미주 한인 성금으로 광복군 출범… 임정 "일제를 타도하자"

입력 2019.05.08 03:00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8] 1940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
中 국민당·외신 기자 등 참석… 호텔서 성대하게 '성립 전례식' 열어
"日은 韓·中 공동의 적… 연합군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선언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을 알리는 '성립 전례식'을 열었다. 가릉빈관은 국민당 정부 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가장 큰 호텔이었다. 현재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기념관이 제공하는 온라인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나오지 않는다. 취재 중 '충칭신보(重慶晨報)' 2015년 2월 16일 자 기사에서 옛 가릉빈관 위치를 고증하는 기사를 찾았다. 가릉빈관 서쪽에 스틸웰 미군 사령관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스틸웰은 1942년 미·영·중·네덜란드 연합군 참모장으로 중국에 파견된 장군이다.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마친 후 김구(왼쪽에서 셋째) 주석과 지청천(왼쪽에서 둘째) 총사령이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마친 후 김구(왼쪽에서 셋째) 주석과 지청천(왼쪽에서 둘째) 총사령이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스틸웰 저택은 지금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지난 3월 2일 충칭 시내를 흐르는 가릉강(嘉陵江)변 가파른 언덕에 있는 '스틸웰[史迪威]박물관'을 찾아갔다. 충칭 지하철 2호선 포투관(佛圖關)역 인근이다. 도심 남쪽을 흐르는 장강(長江)에 합수하기 직전의 가릉강과 충칭 시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릉빈관도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호텔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중국 국민당 관계자를 비롯해 '국공 합작'으로 충칭에서 활동한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충칭 주재 외교관과 외신 기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행사 비용은 미주 한인들이 보낸 성금으로 충당했다. 김구는 회고했다. "우리는 미주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금액 중 비상 준비의 목적으로 저축한 4만원을 전부 내어 제일 화려한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백범일지')

김구는 '한국광복군 선언문'에서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고 밝혔다.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임명했다. 김구는 1940년 3월 이동녕이 사망한 이후 주석직을 승계했다. 임시의정원은 10월 9일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공식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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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스틸웰박물관에서 내려다본 충칭 시내. 광복군이 출범한 가릉빈관이 인근에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했던 워싱턴 호바트 스트리트 2층 벽돌집. /이한수 기자
김구는 중국 정부에 한국광복군 병력이 5040명이라고 전했다. 이는 과시하기 위한 숫자였다. 병력 모집은 쉽지 않았다. 참모장 이범석은 "만리 타국에 우리 군대가 되어줄 젊은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없는 사람을 구해 올 재주는 없었다"('신동아' 1969년 4월호)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1940년 새해부터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고하는 저술에 몰두했다. 1939년 12월 30일 워싱턴 호바트 스트리트 1766번지 붉은 벽돌집을 마련하고 1년 5개월간 집필에 매달렸다. 외양이 똑같은 2층집이 이어져 있는 조용한 주택가다. 백악관 북쪽으로 3.6㎞ 떨어져 있다. 이승만이 필기하면 아내 프란체스카가 타이핑했다. 프란체스카는 퇴고를 거듭한 원고를 세 차례나 새로 타자하느라 손가락이 짓물렀다고 한다.

책은 1941년 8월 뉴욕에서 출간됐다. 제목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머리말에서 일제의 침략을 산불에 비유했다. "산불은 저절로 꺼지지 않는다. … 불길은 당신들(미국인)의 안락을 해칠 만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 당신들은 아직도 '한국인들과 만주인들과 중국인들이 싸움을 하게 하라. 그것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승만은 15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미국의 정책을 비판했다. 한국과 맺은 조약(조미통상조약)의 의무를 미국이 이행하지 않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한 것이 2차 세계대전의 기원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 상황을 서술하고 미국의 안이한 대응을 비판하면서 미·일 전쟁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펄 벅은 '아시아 매거진'에 쓴 서평에서 "무서운 책이다. 나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너무 진실인 것이 두렵다'고 썼다. 책이 출간되고 4개월 후인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6월 4일 국무회의를 열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했다. 이승만은 진주만 폭격 직후 김구에게 타전했다. 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공동 명의로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일 전쟁이 한국의 독립에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김구는 진주만 습격 직전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 강령'(1941년 11월 28일)을 공포했다. 독립 전쟁의 단계를 주권 회복인 복국(復國)과 나라를 건설하는 건국(建國)으로 나누고 조국 광복 실현을 선언했다. 이승만은 12월 25일 자 신한민보에 주미외교위원장이 발표한 '공포서'를 실었다. '이 천재일시의 기회를 끌어잡아 민주주의를 위하여 분투하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여야 되겠습니다. 일인의 군기 공창을 폭파시키고, 왜적의 철도를 파괴하며, 일본 군사가 통행하는 도로 아래에 폭발탄을 묻고….' 이승만은 이를 '신성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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