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北, 군사합의 위반' 이례적 지적...왜?

입력 2019.05.04 17:55 | 수정 2019.05.04 19:53

'저자세 지적' 받던 정부 北 단거리 발사체 발사에 '도발 마지노선 임박' 판단한 듯
비건·볼턴 방한, 트럼프 방일 앞두고 北에 "이러면 진짜 판깨진다" 메시지?

2016년 3월 24일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실시한 북한군의 장사정포 화력 훈련./노동신문
2016년 3월 24일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실시한 북한군의 장사정포 화력 훈련./노동신문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도발에 정부는 4일 "9·19 군사합의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매우 우려한다"고 밝혔다. 남북이 지난해 9·19 군사합의서를 채택한 이후 우리 정부가 북한을 향해 '군사합의 위반'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의 전격적인 무력 도발에 대해 정부는 이날 청와대에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정경두 국방부 장관, 서훈 국가정보원장,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개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발사체 발사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정의용 실장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날 관계부처 회의를 거쳐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는 9·19 군사합의 위반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이와 함께 북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청와대 관계장관 회의 뒤 브리핑에서 "정부는 비핵화 관련 대화가 소강국면인 상태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데 대해 주목하면서 북한이 조속한 대화 재개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정부는 그동안 '저자세 일변도'란 지적에도 북한의 도발 행동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삼갔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북한이 비핵화 협상판에서 이탈하는 것을 염려해 북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지난달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비난했을 때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안팎으로 거듭 천명했다"며 김의 발언을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은은 한국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최고인민회의를 기점으로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김은 최고인민회의 직후인 지난달 16일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제1017부대를 찾아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을 지도했다. 이어 17일엔 국방과학원이 진행한 신형 전술 유도무기 사격 시험을 참관했다. 그로부터 보름여만에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를 감행했다.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과 같은 레드라인(금지선)은 넘지 않으면서 도발 수위를 조금씩 높이며 협상판을 흔들어보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북한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조선일보DB
지난해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북한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부가 이날 이례적으로 북 발사체 발사에 대해 '군사합의 위반'을 지적하며 북한의 태도 변화를 요구한 것은 북의 도발이 교착 국면에 빠진 미·북 협상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에도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비핵화'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북 양측이 하노이 회담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히 맞서면서, 비핵화 협상의 '촉진자' 역할을 내세웠던 현 정부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방한을 앞둔 시점에 북한이 단거리 발사체 도발에 나섰다는 점도 정부로선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특히 정부는 다음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 참석할 때 방한을 성사시켜 미·북 대화 재개를 타진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최근 "북한은 5월 상순, 늦어도 15일까지는 남북 대화에 나와야 한다"고 말한 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을 미·북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정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었다. 그런데 북이 지금처럼 도발을 계속 이어갈 경우 교착 상태에 빠진 미·북 비핵화 협상을 되살려보려던 정부의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정부의 이날 입장은 북에 "더 이상 추가도발을 하면 정말 미·북 협상판이 깨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정부의 이런 의도와는 별개로 전문가들은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에 대한 정부의 이날 대응이 여전히 미온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우리 측의 대응 행동으로 상승 작용이 발생해 긴장감이 높아질 가능성을 우려해 '유감 수준'의 발언으로 매듭지은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우리로선 대비 태세를 보여줄 수 있는 대응 행동에 나서야 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발사체 도발은 명백한 9·19 군사 합의 위반으로 공동연락사무소 회의나 군사 당국간 협의 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 사안"이라며 "북한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줄 수 있는 무기를 발사한 것은 매우 유감이며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어야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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