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때 일본에는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던, '헌신과 희생'

입력 2019.05.01 03:01 | 수정 2019.05.01 09:03

[163]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⑬ 목숨을 건 일본의 혁명가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죽어야 그친다'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생가 대들보에는 '死而後已(사이후이)'라는 낙서가 적혀 있다. '죽어야 그친다'는 뜻이다. '논어' 태백편에 나온다. 목숨을 건다는 말이다. 기도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혁명가다. 간신배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바로 그 목숨을 위해 나라를 버린다. 혁명가, 지사는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다. 19세기 말 일본도 그러했다.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바다를 내려다보는 나가사키 가자가시라(風頭) 공원에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이 서 있다. 동상까지 오르는 가파른 골목길에는 료마의 캐릭터 그림들이 붙어 있다. 이 골목길은 '료마의 길'이라고 불린다. 사카모토 료마.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인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성공시키고 막부가 자발적으로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설득한 사람이다. 삿초동맹은 메이지 유신의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고 대정봉환은 구체제 붕괴의 서곡이었다.

사카모토는 소속 도사번(藩)을 탈출한 떠돌이 무사였다. 집안이 부유한지라 일찌감치 세상을 떠돌면서 속칭 '중2병'적인 글을 쓰고 다니던 반항아였다. 그런데 1853년 에도 앞바다에 들어온 미국 함대를 목격하고 사람이 바뀐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일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을 뿐"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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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가자가시라(風頭) 공원에 서 있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동상. 오른쪽 깃발은 그가 운영했던 주식회사 '가이엔타이' 깃발이다. 하급 무사였던 료마는 1865년 서로 원수지간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극적으로 화해시켰다. '삿초동맹'은 메이지 유신의 실질적인 추진 동력이었다. 이어 막부에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제안해 실현시켰다. 대정봉환 한 달 뒤 료마는 암살당했다. 32세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목숨을 건 혁명가들이 변혁을 이끌었다. /박종인 기자
도사번으로 복귀한 사카모토는 이후 막부가 창설한 해군전습소에 입소해 서양 병술을 익혔다. 1864년 사쓰마번으로 활동 장소를 옮긴 사카모토는 번의 지원 속에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가이엔타이'라고도 했다. 일본 최초 주식회사였다. 세상을 주유하며 조슈번의 혁명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만났고 사쓰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도 만났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 사카모토에게 이들은 친구가 되었다. 페리 함대의 목격, 가메야마사추의 설립, 그리고 혁명가 집단과의 친분. 권력이나 금력은 없지만 그는 비전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을 뒤흔들 큰 사건을 일으켰다.

사카모토가 성사시킨 삿초동맹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버티고 있던 조슈번은 존왕양이의 땅이었다. 막부가 없는 천황제 국가가 목표였다. 1863년과 1864년 조슈번이 시모노세키에서 서양 연합군과 전쟁을 일으켰다. 막부의 뜻에 반하는 행동에 막부는 조슈 정벌을 계획했고 이에 앞장선 번이 사쓰마번이었다. 사쓰마 또한 개혁을 원했으나, 막부 타도까지는 아니었다. 1864년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사쓰마 군사는 상경한 조슈 군사를 궤멸시켰다. 두 번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런데 개혁을 위해서는 당시 가장 막강한 이 두 번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생가 대들보에 기도가 적어놓은 '死而後已(사이후이·죽어야 그친다)'.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생가 대들보에 기도가 적어놓은 '死而後已(사이후이·죽어야 그친다)'. 목숨을 걸고 대업을 이룬다는 뜻이다.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을 완성하고 병사했다.
1866년 막부가 조슈를 다시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사쓰마는 "재정벌은 불의(不義)"라고 반대했다. 화해의 계기였다. 1866년 3월 7일 사카모토 료마 중재로 두 번 사이 거국적인 회담이 열렸다. 사카모토와 함께 중재역을 맡은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가 "작은 분노는 국가의 큰 미래를 위해 누르자"고 했으나 회담은 지리멸렬했다. 서로를 믿지 못했다. 실질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사카모토가 실용적인 안을 내놨다.

"사쓰마의 군함과 상해에 있는 무기를 사쓰마 명의로 사서 조슈에 주고 조슈는 사쓰마에 군량미를 대시라." 어느 편도 자존심을 꺾지 않고 명분과 실리를 다 갖춘 대안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국 유학 도중 귀국했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나가사키에서 영국 무기상 글로버와 계약을 맺었다. 돈은 조슈가, 명의는 사쓰마가, 운반은 사카모토의 가메야마사추가 분담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보증을 섰다. 조슈번은 이듬해 4월 29일 사쓰마에 군량미 500석을 제공했다.

그해 7월 18일 2차 조슈 정벌 전쟁에 사쓰마번은 응하지 않았고, 조슈번 해군사령관 다카스기 신사쿠의 활약으로 조슈가 대승을 거뒀다. 사카모토 또한 조슈 쪽 해군으로 참전했다. 이후 조슈번 번주 모리 다카치카와 사쓰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구원을 풀고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일개 떠돌이 무사에 의해 원수들이 반(反)막부 동맹을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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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현 고잔지(功山寺)에 있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회천거병(回天擧兵) 동상. 다카스기는 1866년 2차 조슈 정벌 전쟁에서 조슈 해군 사령관으로 막부군을 대파했다. 대세는 혁명파에게 넘어갔고, 다카스기는 이듬해 폐결핵으로 죽었다. 28세였다.
1867년 사카모토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는 향후 비전을 완성해 막부에 보냈다. 이 책략 1조가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한다'였다. 그해 11월 9일 막부는 통치권을 천황에게 자발적으로 반환했다. 이게 '대정봉환'이다. 이후 구체제는 급속도로 붕괴됐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 한 달 뒤 수구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32세였다. 그의 국가 비전은 그가 이룬 삿초동맹이 달성했다.

100만 에도 시민을 살린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를 혁명가로 이끈 사람은 막부 관료 가쓰 가이슈(勝海舟)다. 사카모토는 그를 "일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했다. 가쓰 가이슈는 난가쿠(蘭學)에 입문해 항해술과 포술을 익힌 관료였다. 1860년에는 막부의 견미사절단 부함장으로 미국을 다녀온 인물이다. 가쓰가 쓴 '분언일서(憤言一書)'라는 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천하의 대권은 개인이 아니라 공공에 돌아가야 한다.'

가쓰 가이슈(勝海舟).
가쓰 가이슈(勝海舟). 막부 관료였던 가쓰가이슈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에도로 진격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에서 "나라를 생각하라"며 자진해서 에도 성문을 열었다.
대정봉환에 이어 1868년 1월 천황의 왕정복고가 이뤄지자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막부파가 전쟁을 일으켰다. 보신(戊辰) 전쟁이라고 한다. 신정부군은 근대 무기로 무장했고 구체제 막부 세력은 전통적인 칼이 주력 무기였다. 사쓰마와 조슈, 사가번과 도사번 연합 신정부군은 막부 세력을 몰아 에도까지 진격했다.

막부 육군 총재 가쓰 가이슈는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직언했다. "막부는 해군력이 있으니 반란군을 이길 수는 있다. 하지만 싸우면 상처는 깊어지고 서양 열강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해져 일본을 지킬 수 없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구하는 길이다." 한 번도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던 쇼군 요시노부는 진언을 받아들였다. 1868년 3월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신정부군이 에도(江戶)에 접근했다. 목표는 에도 초토화였다. 막부의 강경파들도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300년 전 끝났던 전국(戰國) 시대가 재림할 판이었다.

가쓰는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은 국민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당신이 현명한 조치를 취하면 에도도 나라도 구할 수 있지만 판단을 그르치면 나라는 붕괴된다." 4월 5일과 6일 사이고와 가쓰가 담판을 가졌다. 사이고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에도를 넘기시라." 가쓰가 말했다. "넘기겠다." "무기와 탄약도 넘기시라." "넘기겠다. 단, 바로 무기를 반납하면 강경파가 반발해 전쟁이 터진다. 반납 시기는 늦춰 달라."

5월 3일 막부는 에도 성문을 열었다. 신정부군은 무혈 입성했다. 100만 인구가 사는 에도는 전화(戰火)를 피했다. 두 거인(巨人)이 '나라'라는 공공선 앞에서 합의한 것이다.

도쿄대 교수 미타니 히로시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프랑스 국내 60만, 대외 전쟁에서 140만, 합계 약 200만 명의 정치적 사망자가 발생했다. 메이지 유신기 사망자는 어느 정도 오류를 감안한다면 3만 명 전후로 추정된다.('메이지유신의 해부-비교사적 관점에서')

사이고는 이후 사쓰마번 무사들이 봉기하자 이를 지휘해 반군을 일으켰다가 할복 자결했다. 도쿄 가쓰 가이슈 부부 무덤 옆에는 가쓰가 세운 사이고 다카모리 유혼비가 서 있다. 가쓰는 메이지 정부에서 요직을 지냈다.

2차 조슈정벌 전쟁 때 '하늘을 돌리는 혁명(回天擧兵)'으로 막부를 패퇴시킨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다카스기는 결사대 4000명을 지휘해 10만 막부군을 상대했다. 감히 막강한 막부를 토벌할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그때, 다카스기가 없었다면 혁명은 불가능했거나 지지부진했다. 그가 남긴 말은 "나라가 바로 되면 죽어서 고생을 맛본다"였다. 다카스기 또한 전쟁 승리 다음해 폐결핵으로 죽었다. 28세였다.

동과 서를 막론하고 역사상 모든 변혁은 잔혹했다. 이제 격변하던 19세기, 조선의 '死而後已'를 들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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