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에 비난받은 이승만, 총탄 맞은 김구… 20년 독립운동에 찾아온 위기

입력 2019.05.01 03:01 | 수정 2019.05.01 18: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7] 1938~1939년, 임시정부 출범 20년
일제의 中 침략 노골화… 이승만, 하와이에 광화문 본뜬 교회 세워
임정 수립 후 20년 지나도 독립 못하자 美 교민들, 이승만 비난

하와이에도 '광화문'이 있다.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 이승만이 현지 미국인과 교민들 성금을 모아 설립한 한인기독교회 건물이다. 예배당 정면을 광화문 모양으로 세웠다. 1937년 10월 3일 착공해 이듬해 4월 24일 완공했다.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은 한국의 주권을 상징했다. 현재 건물은 2006년 개축했다. 마당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이 서 있다. 교민들이 광복 40주년인 1985년 세웠다.

1938년 5월 7일 창사 난무팅에서 총상을 입은 김구의 모습.
1938년 5월 7일 창사 난무팅에서 총상을 입은 김구의 모습.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1949)의 유품에서 나온 사진이다. 부산박물관이 6월 9일까지 '파리의 꼬레앙, 유럽을 깨우다' 전에서 전시한다. /부산박물관
이승만이 하와이에 광화문을 세운 때는 일제가 중국 침략을 노골화하던 시기였다. 일본 관동군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노구교(루커우차오)에서 병사 한 명의 실종을 빌미로 전면 침략 전쟁에 돌입했다. 베이징·상하이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12월 13일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을 점령해 시민 20만~30만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전쟁 상황을 관망했다. 예전 같으면 바로 워싱턴으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쳤을 터이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워싱턴·상하이·제네바 등을 오가며 20년간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만을 비난하는 교민이 많아졌다. 이승만은 당시 상황을 "내가 혼자 인도자 책임을 가지고 동포의 재정을 쓰면서도 독립은 회복하지 못하고 보니 자연 내게 대한 악감(惡感)이 심해져서…"라고 '태평양주보'(1939년 4월)에 썼다.

주저하는 이승만에게 지지 단체인 대한인동지회가 결심을 촉구했다. 이승만이 1921년 7월 설립한 동지회는 출범 때부터 '임시정부 옹호'를 천명했다. 동지회 회장 이원순은 이승만에게 워싱턴으로 가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집필해야 한다('세기를 넘어서')고 설득했다. 이승만은 "나도 원하는 바였다"고 승낙했다. 이승만은 1939년 3월 30일 호놀룰루를 떠났다. 5월 7일 워싱턴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이승만이 1938년 광화문 모양으로 세웠다. /이한수 기자
이승만은 3개월 후 다시 하와이에 갔다가 11월 10일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당시로선 '기약 없는 길'이었다. 한인기독교회 목사 김형식은 "선생의 이번 길은 잠시가 아니고 기약 없는 길이다. 중국의 승리냐 일본의 패망이냐 하는…(이때) 우리 민족의 목적을 관철하고 개선가를 부르는 영수(領袖·지도자)를 불원(不遠)한 장래에 환영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태평양주보' 1939년 11월 18일)고 했다. 예순네 살 노(老)독립운동가는 해방 때까지 하와이로 돌아가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대륙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피해 여러 차례 근거지를 옮겼다. 항저우(1935년 11월)→진장(1937년 11월)→창사(1938년 7월)→광저우(1938년 10월)→류저우(1939년 3월)→치장(1940년 9월)을 거쳐 국민당 정부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했다.

김구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분열된 우파 진영을 통합하는 '광복진선(光復陣線)'을 1937년 8월 17일 결성했다. 김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국민당,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3당과 미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등이 연합했다. 광복진선은 임정 옹호를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3천만 민족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영도기관으로서 3·1운동의 정맥을 이은 기구이다. 임시정부는 전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이다."('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통합 과정에서 김구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3당 통합을 위해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본부인 창사 난무팅(楠木廳·남목청)에서 회합 중이었다. 한 청년이 난입해 권총을 쏘았다. 조선혁명당 현익철이 숨졌고, 김구는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예순두 해 인생에서 맞은 최대 위기였다. 다행히 탄환은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의사는 갈비뼈 아래 박힌 탄환을 빼내지 않아도 생명에 지장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김구는 이후 탄환을 몸속에 갖고 살았다. 김구는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래도 동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하지 못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신념을 뉘우치지 아니하며 앞으로 그것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1938년 6월 20일 '여러분 선생께')

김구는 1939년 8월 민족혁명당 김원봉 등 좌파 4개 단체를 포함해 '7당 통일회의'를 열어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려고 했다. 임시정부에 재정을 지원하는 중국 국민정부가 한국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을 종용했다. '국공합작' 중인 중국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된 힘을 대일 항전에 이용하려고 했다. 김구는 조완구·엄항섭 등 측근의 만류와 미주 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합 작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김구는 이를 공산주의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구는 국민당 중앙당부에 보낸 편지(1940년 1월 26일)에서 "지난 20년간 한국 독립 단체 간 분쟁의 씨앗은 공산당이 뿌린 것"이며 "그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민족운동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소멸시키고자 획책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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