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쓴 前 외신기자 "KBS, 영어원문까지 요구… 안기부 시절이 떠올랐다"

조선일보
  • 김수혜 기자
    입력 2019.04.23 01:45 | 수정 2019.04.23 01:47

    [오늘의 세상]
    자기들 생각과 다른 칼럼 썼다고… 필자 압박한 공영방송

    지난주 금요일(19일) 오전, 영국 언론인 마이클 브린(67) 전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은 KBS 기자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브린 전 회장이 지난 6일 조선일보에 '광화문광장에 세월호 추모 시설을 설치하는 데 반대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는데 경위를 묻는 취재였다. KBS 기자는 브린 전 회장에게 "조선일보가 써달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마이클 브린 전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은 37년간 한국 사회를 지켜본 대표적인 지한파 해외 언론인이다.
    마이클 브린 전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은 37년간 한국 사회를 지켜본 대표적인 지한파 해외 언론인이다. 그는 광화문광장에 세월호 추모 시설이 들어서는데 반대한다는 칼럼을 본지에 기고했다가 KBS 기자에게 "원문 좀 보여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마이클 브린
    브린 전 회장은 1982년부터 37년째 한국 사회를 지켜본 언론인이다. 영국 가디언지와 더타임스지, 미국 워싱턴타임스지 서울특파원을 지냈다. 한국 사회를 가장 깊이 알고 이해하는 해외 지식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올 들어 본지 고정 칼럼 필진으로 동참한 뒤 지난달 '민심이 법 위에 있어선 안 된다'는 첫 칼럼을 쓰고, 이달 초 두 번째 칼럼에서 세월호를 다뤘다.

    그는 칼럼에 "세월호 사고는 끔찍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 더욱 그랬다"라고 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월호 추모 시설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상징하는 광화문광장의 주제와 맞지 않는다"며 "서울시가 이곳에 세월호 추모 공간을 만들려는 건 '한국인은 희생자'라는 한국 특유의 사고방식에 맞닿아 있고, 세월호 희생자들이 정치적 의도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광화문에 세월호 추모시설 반대' 마이클 브린씨의 칼럼 보여준 후
    브린 전 회장은 KBS 기자에게 "조선일보에 매달 한 번씩 칼럼을 쓰고 있다"며 "조선일보에 칼럼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고, 조선일보가 이런 걸 써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대답했다. KBS 기자는 "원문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브린 전 회장은 원문도 보내줬다.

    외국인이 민간 매체에 논쟁적인 내용을 기고했다고 그 나라 공영방송이 "원문 좀 보자"고 나서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브린 전 회장은 본지에 "내가 쓴 글이지만 원고를 다른 언론사에 보내도 괜찮겠냐"며 양해를 구해왔다. 본지는 "당연히 괜찮다"고 브린 전 회장에게 말했다.

    이후 본지는 KBS 해당 기자에게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데,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해당 기자는 "그것까지 말씀드리긴 어렵다"고 했다. 원문을 요구한 이유에 대해선 "브린 전 회장이 '영어로 썼는데 조선일보가 고쳤다'고 해서…"라고 했다가, "아니, '조선일보에서 번역을 했다'고 해서…"라고 말을 바꿨다. "한국어로 쓴 줄 알았는데 영어로 쓰셨다길래…"라고도 했다.

    KBS는 21일 밤 1TV 시사 프로그램 '저널리즘토크쇼J'를 통해 칼럼 내용을 집중 비판했다. 이틀 전 KBS 기자가 칼럼 필자에게서 "조선일보와 상의하고 쓴 칼럼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원문까지 받아봤지만, 실제 방송에서는 '조선일보가 특정한 내용의 칼럼을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쓰도록 시켰거나, 외국인이 쓴 칼럼을 의도적으로 잘못 번역했을 것'이라는 프레임으로 엮어갔다. 브린 전 회장의 칼럼이 실린 지 사흘 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 "이런 지적과 문제 제기를 한국 기자가 아닌 외국 기자가 했다는 점이 부끄럽다"는 별도의 칼럼을 썼다는 이유였다.

    프로그램 패널인 송현주 한림대 교수는 "마이클 브린이 쓴 칼럼이 나오고 나서 (김대중 고문의 칼럼이 나온 걸 보면) 어찌 보면 같은 기획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준희 중앙대 겸임교수가 "가장 중요한 건 조선일보가 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쓸데없이 외신기자에게 시키느냐는 것"이라며 "나는 이걸 복화술 저널리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진행자 정세진 아나운서는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영어로 쓴 걸 잘못 혹시…. 그런 건 아니죠?(웃음)"라고 했다. 이틀 전 자기네 기자가 아니라고 확인해 놓고도, '팩트'와 다르게 말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담은 두 칼럼을 "철저한 위선" "후안무치" 같은 거친 말로 공격했다. 송현주 교수는 "브린 전 회장은 광화문광장이 영웅들의 장소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촛불 혁명이 일어난 장소"라면서 "브린 전 회장이 잘못 이해했다"고 했다.

    유일한 외국인 패널인 숄츠 기자가 "브린 전 회장의 칼럼에 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며 "(광화문광장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 광화문광장에 만들면 '그럼 5·18도 합시다' '4·3 사건도 합시다' 할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바로 팟캐스트 진행자 최욱씨가 "그럼 이순신 장군은 거기서 싸워서 거기 있느냐"고 받았다.

    브린 전 회장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칼럼을 썼다고 KBS가 "원문을 보자"고 요청한 데 대해 "권위주의 시대 안기부 직원이 외신기자 사무실에서 원고를 걷어가던 일이 떠오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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