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

조선일보
  • 양승주 기자
    입력 2019.04.22 03:00

    [정동환]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 기념 '고도를 기다리며' 주인공 맡아

    19일 오후 4시 서울 대학로. 봄 햇살과 젊음이 가득한 거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덥수룩한 백발에 수염, 무채색 옷차림까지…. 그가 '회장 전문배우'로 불리는 배우 정동환(70)인지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부랑자 역할이 이래서 좋아요. 꾸밀 필요도 없고, 사람들이 거의 알아보지도 못하거든. 하하!"

    배우 정동환
    배우 정동환은 "많은 사람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난해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나 역시 나이가 들며 이 작품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이 많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부랑자'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아일랜드 출신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쓴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기약 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다. 임영웅(83) 연출은 1969년 12월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국 초연한 것을 계기로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1989), 아일랜드 더블린 연극제(1990), 일본 도쿄 스미나미 홀(1999) 등에 이 작품을 올려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산울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국내 초연 50주년을 기념해 다음 달 9일부터 기념 공연을 연다. 1990년 마흔한 살에 처음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고, 산울림 창단 45주년 공연에서도 같은 역을 했던 정동환은 "남들은 '해봤으니 쉽지 않으냐'고 하지만 몇 번을 해도 쉽지 않은 역할"이라며 "평소 등산 다니며 관리한 체력으로 겨우 버틴다"며 웃었다.

    1990년 10월 아일랜드 더블린 연극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는 정동환(블라디미르 역·오른쪽)과 송영창(에스트라공 역).
    1990년 10월 아일랜드 더블린 연극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는 정동환(블라디미르 역·오른쪽)과 송영창(에스트라공 역). /극단산울림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시골길, 남루한 옷차림의 두 남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끝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 자는 뭐라고 할 지 어디 기다려보자" "누가?" "고도 말이다" "참 그렇지" 등 별 의미 없는 대사들이 2시간 넘도록 떠다니지만, 고도의 정체나 이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정동환은 "1990년 첫 공연 앞두고 대본을 받아들었을 때 마치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지금보다 훨씬 팔팔했을 때지만, 공연 시작하고 20분만 지나면 넥타이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어요. 너무 힘들어서 임 선생님께 '공연을 하루만이라도 줄여달라'고 애원할 정도였죠."

    그해 10월 정동환은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연극제에서도 블라디미르로 무대에 올랐다. 현지 언론 '아일리시 프레스'는 그와 에스트라공 역의 배우 송영창의 사진과 함께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Korean Godot worth the wait)'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더 보수적이고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강해요. 그런데도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공연을 꼽았다는 건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죠." 그는 "임영웅표 고도'는 베케트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연극적 재미를 온전히 살린다는 점이 차별화된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정동환에게도 남다른 해다.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로 데뷔해 배우 인생 50년을 맞았다. 많은 이에게 영화와 드라마 속 얼굴로 기억되지만, '레이디 맥베스' '단테의 신곡' 등에 출연하며 연극 무대를 지켜왔다. 특히 예순 나이에 출연한 '고곤의 선물'에선 전라(全裸) 노출을 포함한 파격 연기를 선보였고, 그 열정은 이듬해 '이해랑연극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연극은 아무리 잘돼 봤자 남는 게 없어요. 어차피 힘들고 어렵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하고 싶었죠. 그러다 보니 쉽지 않고, 장사 안 되는 작품만 몰리나 봅니다."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그가 떠올린 단어는 '희망'이다. "블라디미르에겐 나무도 있고, 이야기할 친구도 있고, 언젠간 올 거라고 믿는 고도라는 존재도 있죠. 고통스럽고 배고픈 인생이지만, 베케트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관객들도 '내일이면 고도가 온다'는 마음을 품고 공연장을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5월 9일~6월 2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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