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새 바퀴 다는 것… 아프리카 교육 원조 12년, 희망이 보인다"

조선일보
입력 2019.04.20 03:00

[아무튼, 주말]
국경없는교육가회 김기석 대표

[아무튼, 주말]
타이어 뒤로 김기석 국경없는교육가회 대표가 보인다. 가나안농군학교 개척자 김용기 선생의 둘째 사위인 그는 “아프리카에서 교육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있다”고 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리타이어(retire)는 은퇴가 아니에요. 바퀴를 갈아 끼우는 '리(re)-타이어(tire)'입니다. 대학에서 수십 년 일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 노하우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봉사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2013년 8월 서울대 정년 퇴임식. 은퇴하는 27명을 대표해 연단에 오른 김기석 교육학과 교수가 말했다. 청중이 웃었다. 그는 "인생 후반기에 우리는 신참 교수, '새타 교수(새 타이어 같은 교수)'"라고 했다.

그는 이날 은퇴하지 않았다. "한국도 원조를 받아 성장했으니 교육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싶다"며 아프리카로 달려갔다. 1인당 GDP 700달러에 남녀 차별이 극심한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 1950년대 말 한국처럼 가난한 그 나라에서 글과 셈, 농업 기술을 가르쳤다. 타이어를 바꾼 지 6년. 잠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달 말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국경없는교육가회(EWB·대표 김기석)와 일가재단(이사장 손봉호)은 지난 2월 부르키나파소에서 농업·기술 지도자를 기르는 일가가나안회관을 완공했다. 김기석(71) 대표는 "부르키나파소 상공회의소가 '앞으로 3년간 해마다 10만달러씩 운영비를 내겠다'고 한다"며 "원조만 받던 사람들이 '거지 근성'을 깨고 나왔으니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코리안 빌 클린턴

그는 2007년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국경없는교육가회를 만들었다. 일찌감치 은퇴를 준비한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를 본보기로 교육자들과 지역 전문가들을 모았다. 부르키나파소를 중심으로 케냐·세네갈·에티오피아에서 한국 교육의 개발 경험을 이식하고 있다.

―빌 클린턴을 닮으셨네요.

"제 별명이 코리안 빌 클린턴, 줄여서 '코빌'이에요. 추문에 얼룩진 클린턴이 아니고, 대통령 퇴임 후 아프리카 에이즈 퇴치에 힘쓴 클린턴입니다. 하하하. 어디를 가든 '코빌'이라고 소개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깨져요."

―교육학자가 엉뚱하게 '타이어'로 유명해지셨습니다.

"제가 만든 말이에요. 미국 위스콘신대학 제 지도교수가 퇴임할 때 서울로 초청해 한국식 떡을 차리고 're-tire'라고 썼어요. 농담 삼아 '타이어를 바꿔 새로 달리자'는 뜻이라 하니 바로 이해하시더라고요. 서울대 정년 퇴임식에서도 써먹었지요."

―부르키나파소는 낯선 나라인데요.

"2007년에 초청받아 처음 갔는데 한 소년이 물 한 그릇을 대접했어요.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지요. 손자다 생각하고 '교육 입양'을 했는데 지금은 의과대학에 다닙니다. 교육 입양한 손녀도 둘 있는데 각각 간호사, 공무원이 되고 싶대요. 그 나라 지도자들이 제게 '한국이 가진 교육과 경제 발전의 경험을 펼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그는 주한 부르키나파소 명예 영사다)."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가요.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책을 가져와 달라고 할 정도예요. 부르키나파소는 인력과 농업 개발이 우선입니다. 특히 여성들은 삶이 비참해요. 남편에게 짓눌려 있고 말이 가정 밖으로 안 나와요. 극빈층 문맹(文盲) 여성들에게 저희가 글과 셈, 농업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게 깨졌어요. 이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고 합니다. 부부싸움도 줄었대요."

―늘어난 게 아니고요?

"돈 벌지, 글 알지, 기술도 있으니 남편 앞에서 당당해진 거예요. 집안에서 여성의 지위가 올라갔습니다. 그게 성평등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저희가 콩 농사, 양계 등을 가르치는데 처음엔 반대하던 남편들이 이젠 배우러 옵니다."

―흥미롭군요.

"가난한 사람들이 글과 셈, 기술을 배워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지면 어떤 차별이나 잘못된 관행을 고칠 수 있다는 걸 그곳에서 배웠어요."

아프리카에서 거지 근성을 깨다

[아무튼, 주말]
사하라 사막 서쪽에 있는 부르키나파소는 '고귀한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토마 상카라(1949~87) 전 대통령이 존경받는다.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고 한다.

―'상카라 철학'이라는 게 있나요.

"자력갱생입니다. 상카라 전 대통령은 부르키나파소의 신화(神話)예요. 너무 솔직 담백해서 죽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10여 년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맨땅에 헤딩하기였지요(웃음). 특히 운영비를 모으고 쓰는 문제로 힘들었어요. 전기도 안 들어가는 마을에서 신용카드가 되겠어요? 지원금을 받았으니 지출 내역을 증빙해야 합니다. 아프리카를 이해해야 할 시간에 영수증 처리에 바쁜 자원봉사자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어요."

―국경없는교육가회 예산은.

"연간 2억원 정도예요. 외교부 산하 국제협력단과 경기도 광명시가 1억원 남짓 지원해주고 구멍은 후원금을 모아 메웁니다. 그래서 1년에 반은 아프리카, 반은 한국에서 보내요."

―일가가나안회관은 몇 년 걸렸나요.

"5년에 걸쳐 3억원을 모았습니다. 서울대 정영일·노정혜 교수 등이 받은 상금을 기부했고 여럿이 십시일반 보탰지요."

―부르키나파소에 가장 큰 변화라면.

"원조를 받다 보면 '거지 근성'이 몸에 뱁니다. 무슨 일이든 남의 도움부터 바라지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쉽지 않아요. 계속 퍼주기만 할 순 없는데 이번에 그들이 돕겠다고 나선 겁니다. 거지 근성이 깨진 거예요. 저도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타이어 바꾸고 달린 지 6년인데.

"어느 시점에서는 물려줘야지요. 3년 후 그들이 자력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일가가나안회관을 기부 채납할 생각이에요."

[아무튼, 주말]
부르키나파소에서 글과 농업 기술 등을 가르치는 국경없는교육가회 김기석 대표. / 국경없는교육가회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

5·16 직후인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했다. 간식으로 나온 빵을 무심코 입으로 가져가자 김용기(1909~1988) 교장이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는 식전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고 외쳐야 합니다." 박 의장은 빵을 내려놓고 그 구호를 외쳤다.

―일가 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라는 겁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실질을 숭상하라'고 하셨어요."

―부르키나파소에서 그동안 몇 명을 지원했는지요.

"1500명이 글을, 다른 1500명이 농업 기술을 배웠어요. 또 1000여 명에게 소액을 빌려줬는데 회수율이 95%가 넘습니다. 그 돈을 계속 돌릴 수 있었지요. 교육의 힘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거지 근성이 깨질 때 어떤 임계점을 지나나요?

"농민에게는 가계 소득입니다. 벌이가 늘어나면 '할 수 있다'고들 생각해요. 아프리카는 부족사회다 보니 '부족 부패'가 심해요. 부족이 뭉쳐서 대통령을 만들면 그 밑으로 먹고사는 겁니다."

―NGO도 난관이 있을 텐데요.

"재정적 어려움 말고는 없어요. 그 나라에서 15명이 저를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중에 포드 자동차 판매원이 있는데 한국 강사한테 교육받고는 '역시 한국인은 다르다'고 해요. 전에는 점심을 두 시간쯤 먹었는데 피자 시켜놓고 일하더라며(웃음)."

―강사는 어떻게 구하나요.

"은퇴자들을 모시고 있어요. 전문가가 퇴임하고 등산 다니고 술이나 마시는 게 안타까워요. 은퇴 이후는 긴 시간입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재능을 기부하며 보람찬 인생 2막을 여는 겁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에 도전할 수도 있고요."

―은퇴 앞둔 분들은 막막할 텐데요.

"바퀴를 바꿔 달 준비 없이는 못 해요. 영어 공부든 뭐든 최소한 60세부터는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예열을 해둬야 퇴직하자마자 시동을 걸 수 있어요."

한국의 60~70대는 너나없이 빈곤을 경험했다. 맨바닥에서 일어나 어렵게 공부했고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김 대표는 "대한민국은 경제 강국 중에서 가난을 이긴 생생한 경험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며 "그 성공 열매를 아프리카에 나눌 분들의 관심과 동참을 기다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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