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빗발치는 전쟁터부터 총성 없는 외교 전쟁터까지

총알 빗발치는 전쟁터부터 총성 없는 외교 전쟁터까지

조선일보
입력 2019.04.22 02:00 | 수정 2019.05.10 10:50

[Fact /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 현장에서 진실을 전합니다]
2003 이라크전 종군기자·2019 하노이회담 특파원 강인선 기자

2003년 3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 개전을 선언한 날 밤, 저는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국경을 넘기 위해 대기 중이었습니다. 국경 너머에선 둔탁한 포성이 들렸고 이라크가 쏜 스커드 미사일이 날카롭게 밤하늘을 갈랐습니다.

그때 저는 워싱턴 특파원이었습니다. 미 국방부는 당시 기자들이 군인과 함께 움직이며 전쟁을 취재할 수 있도록 '임베디드(embedded) 저널리스트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언론이 지원했고 저는 최종 선발된 기자 약 500명과 함께 전쟁터에 뛰어들었습니다. 1m 앞도 안보이는 모래 돌풍을 뚫고, 때론 조명탄에 의지해 사막을 건너 바그다드까지 갔습니다.

2003년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사막의 전쟁터에서 통신이 제일 걱정이었다. 인터넷이 안되면 기사를 보낼 수 없으니 늘 조마조마했다. 전화는 세 종류를 가지고 갔는데 그중 하나라도 잘 터지면 다행이었다. 이라크 사막의 기온이 섭씨 50도 가까이 치솟으면 노트북 컴퓨터가 '열 받아' 망가질까 봐 그늘로 모시고 다녀야 했다.

'어쩌면 오늘 쓴 이 기사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사일 수도 있다.' 사막의 전쟁터에서 거의 한 달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마음으로 제가 보고 겪은 이라크 전쟁을 독자들께 전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독자가 "목숨 걸고 현장까지 가서 생생한 기사를 보내줘 고맙다"는 응원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포성은 들리지 않지만 마음은 더 전쟁 같은 취재도 있습니다. 서울과 워싱턴, 싱가포르와 하노이를 오가며 취재해야 하는 북핵 문제가 그렇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북 관계는 대북 군사 공격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위기 상황에서 극적으로 벗어나 정상회담 외교로 이어졌습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날아간 현장에서 저는 늘 북핵 해결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마음 졸이다가 돌아옵니다. 상황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외교 현장을 오가면서 진정한 평화를 원하면 어떠한 환상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그랬던 것처럼 현장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독자들께 현실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강인선 기자의 종군기] "거친 돌풍…포탄 날아와도 안들릴 지경"

이라크전쟁 8일째. 바그다드 남쪽170km 美5군단에서 (2003년 3월 27일 3면)

이라크 사막의 거친 돌풍은 비를 쏟으며 밤새도록 막사를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마치 누군가 커다란 망치로 막사를 때려 부수는 것 같았다. 이 거친 소리가 바람 소리인지 포성인지 구별되지 않아 불안한 상태에서 과연 내일 아침까지 버틸까 걱정하면서 방독면을 꼭 끌어안고 잤다. 그래도 비가 내리고 돌풍이 불면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한다 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점은 위안이 됐다.

2003년 3월 23일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한 영국인 병사가 멀리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 미군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영국군과 21일 밤 이라크 국경을 넘었고 수도 바그다드 등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이 공습은 '충격과 공포(Shock & Awe)' 작전이라 불렸다./AFP연합뉴스

26일 오전 7시(한국시각 오후 1시) 내가 배속돼 취재하고 있는 미군 5군단 지원사령부(COSCOM)의 공격지휘소(ACP)는 전에 없이 다급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지원사령부 사령관인 플레처(Fletcher) 준장은 완전히 목이 쉰 상태로 무전기를 들고 “물과 식량을 실은 차량의 현재 위치가 어디냐?”고 후방의 보급기지를 다그치고 있었다. 쿠웨이트에서부터 막대한 보급 차량들이 동시에 서북 쪽으로 이동하면서 미군의 주요 보급로는 이들 차량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곳곳이 내려앉았고, 이동 차량이 너무 많아 정체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모래 돌풍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이동 속도가 점점 늦어져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바그다드 진격을 앞두고 집결 중인 미군 전투부대들을 지원하는 이곳 램스 보급기지에는 25일 하루 동안 수십 개의 참호가 더 만들어져 외곽뿐 아니라 막사 근처에까지도 참호가 파여 있다. 스팅어미사일을 탑재한 차량이 종일 기지 주변을 순찰한다. 이라크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미군 입장에서 이라크 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다.

2003년 3월 27일 3면

25일에는 종일 모래 바람이 불다가 해질녘이 되자 주변이 오렌지색 모래 안개에 뒤덮였다. 잠시 후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모래 안개는 완전히 빨간 색으로 변해 마치 화염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 희한하고 불길한 분위기….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라크인들에게는 이런 기이한 기후가 일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모래 바람이 부는 날이야말로 그들에게는 공격의 적기일 것이다.

26일 오전 8시(한국시각 오후 2시)쯤 식량과 물을 실은 보급 차량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ACP 막사에 안도의 한숨이 돌았다.
그래봤자 이 지역에 주둔 중인 전투부대와 보급부대가 이틀이면 다 소비하고 말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플레처 장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연료와 탄약이 필요한 상태”라고 말했다.

25일 오후 램스기지 주변에서 미군들이 한 이라크 남자를 전쟁 포로로 붙잡았다. 그는 자신이 농부이며 양들에게 먹일 적당한 풀밭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미군들은 그의 집에서 무기를 발견했다. 그는 ‘늑대(미군)가 나타났다’고 외친 이라크의 정탐꾼 ‘양치기’였는지도 모른다.

한낮의 기온은 무섭게 치솟아 화생방복을 입고 방탄조끼에 헬멧까지 쓰고 있으면 가만 앉아 있어도 지친다. 화생방복은 그야말로 ‘찜질복’이라 땀띠가 나기 시작했다. 씻을 물을 구경한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고, 손 끝은 갈라져 갈퀴처럼 거칠어졌다.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해 막사 안에서 깜박 잠이 들면 환상처럼 밝은 꿈을 꾼다. 커다란 목욕탕이 딸린 별 5개짜리 호텔에 투숙하는 꿈, 샐러드가 푸짐하게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즐거워 하는 꿈….

그러나 정신을 차려 보면 여기는 이라크의 사막 한가운데, 숨막히는 전쟁터다. 나는 워싱턴의 백악관에 편하게 앉아서 이 전쟁을 결정한 소위 ‘정책 결정자’라는 인간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 싸여서 비상휴대용 식량봉투를 연다. 치즈라도 한 덩어리 나왔으면 좋겠다.

2월 27일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베트남 하노이의 미디어센터에서 강인선 워싱턴 지국장이 외국 기자들과 함께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다.

[강인선 워싱턴 지국장]

기자 경력 30년 차로서는 드물게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워싱턴특파원, 국제부장, 논설위원등을 거쳐 지금은 워싱턴으로 돌아와 지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강인선라이브'라는 방송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조선일보의 '강인선의 워싱턴라이브'를 통해 워싱턴 분위기를 전합니다. 북핵 문제와 한미 동맹을 비롯, 국제 정치와 외교 안보 이슈를 주로 다룹니다. 이라크 전쟁 종군 취재를 비롯해, 캄보디아 내전 등 국제적인 분쟁 현장과 인연이 많습니다.


조선일보 100년 특집 -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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