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현의 뉴스 저격] 무상복지 20년, 남은 건 파괴뿐… 민간기업 1만2000→4000개로 줄어

입력 2019.04.19 03:00

'내 조국 베네수엘라, 이렇게 결딴 났다' 어느 지식인의 토로

호세 그레고리오 콘트레라스 에르난데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가 남긴 것은 파괴뿐이다."

베네수엘라중앙대학(UCV)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호세 그레고리오 콘트레라스 에르난데스(51·사진) 교수는 최근 본지와 가진 서신 인터뷰에서 지식인으로서 자국의 경제 몰락을 지켜보는 괴로운 심정을 밝혔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5년째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작년 한 해 인플레이션율이 170만%, 국외로 탈출한 난민이 340만명에 이른다.

에르난데스 교수는 베네수엘라 학계와 정계를 모두 거쳤다.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Complutense)와 UCV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4~1998년 대통령 직속 국가개혁위원회에서 총재 보좌관으로 일하며 베네수엘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2010년 총선에서 야당연합(MUD) 소속으로 당선돼 초선 국회의원(2011~2016)을 지냈다. 현재는 야당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전 의원이 이끄는 벤테 베네수엘라(Vente Venezuela)당에서 정책 고문을 맡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차베스가 주도한 '볼리바르 혁명'이 공화국을 파괴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 통계에 따르면 1997년 1만2000곳이었던 민간 기업은 사회주의 혁명 20년 만에 4000곳 이하로 줄었다. 그 시절 선전했던 빈곤율 저하나 경제성장 역시 결국 허상이었다. 지금 빈곤율은 90%를 넘는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1999~2013) 신자유주의 흐름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주 내용으로 하는 볼리바르 혁명을 추진했다. 도시 빈민과 농민에게 집과 땅을 나눠주고, 무상 교육·의료, 저소득층 보조금 지급 등 무상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그 결과 1998년 49%에 달하던 빈곤율은 2012년 25%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경제에 공짜는 없다. 2000년 28%였던 GDP 대비 정부 지출은 2013년 40%까지 늘어났다. 재정 수지는 2007년부터 마이너스에 들어선 뒤 매년 악화됐다. 돈을 퍼부었지만, 주변 남미 국가들에 비해 경제성장률도 높지 않았다. 차베스 집권기 평균 경제성장률은 3%로 같은 기간 브라질(3.4%), 칠레(4.1%), 페루(5.2%), 콜롬비아(3.6%)보다 낮았다.

―석유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가 '자원의 저주'를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국유화한 석유공사 PDVSA는 '악의 뿌리(Las raíces de los males)'다. 국유화 이후 석유 산업은 누구도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 없는 정부의 밀실(caja ne gra)이 돼 버렸다. 벌어들인 돈은 산업 다각화에 쓰이기는커녕 모두 포퓰리즘 정책과 부패로 흘러 들어갔다. 차베스는 경제 주권 확립과 석유 수익의 국민 환원을 약속하며 국유화했지만, 실상은 석유 수익을 정권 연장 수단으로 낭비하는 '페트로 포퓰리즘'이었던 것이다."

―산업 다각화에 대한 논의는 없었나.

"자본이 있을 때 산업 다각화에 투자해 유가(油價)에 휘둘리는 경제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국내 전문가들의 지적이 많았지만 차베스·마두로 정부 누구도 듣질 않았다. 석유 외에도 통신·은행·철강·전력 등 주요 산업을 모두 국유화했다. 기업 임원 자리는 정권의 낙하산 인물로 채우기 시작했다. 경영 실패와 생산성 하락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영화한 전력 기업은 2005년 전기료를 동결하면서 2012년 벌어들인 돈으로 인건비의 70% 수준을 충당하는데 그쳤다. 2006년 15만대에 달하던 자동차 조립 생산 대수도 2016년 3000대까지 하락했다.

베네수엘라 GDP 추이 그래프

―현 마두로 정부의 경제 위기 대처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현 정부의 대책은 문제 해결보단 주민 통제에 초점이 가 있다. 예컨대 초인플레이션에 대해선 잦은 봉급 인상으로만 대처해 소규모 사업체를 모두 망하게 했다. 정부가 나눠주는 임시 지폐나 식량 상자(CLAP)는 모두 주민들의 불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를 받기 위해선 '조국 카드(Carnet de la Patria)'를 발급받아 정부 감시를 받거나 친(親)정부 행사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90%가 정권을 규탄하면서도 대규모 대중 봉기는 없는 이유다. 베네수엘라에는 정부를 따르는 이들 아니면 빈민층이라는 두 계층만 있는 상황이다."

베네수엘라의 조국 카드는 중국 통신 장비 회사 ZTE에서 만든 것으로 개개인의 각종 신상 정보를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와 연계돼 있어 소지자의 행적과 동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주민증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마두로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사태가 장기화하는 조짐이 보인다. 이대로 가면 국민만 죽어 나갈 것이다. 마지막 남은 수단으로 베네수엘라 헌법 187조를 발동해야 할지도 모른다."

과이도 국회의장도 언급했던 베네수엘라 헌법 187조는 국회가 베네수엘라군의 해외 파견 임무와 외국 군대의 국내 임무 수행을 승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 승인 아래 이뤄진 외국군 개입으로 마두로 정권을 축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 중 하나라는 한국과 지금의 북한을 비교해보면 나라 체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산유국은 고유가때 국부펀드 쌓아 저유가 위기 넘겨… 베네수엘라는 '비상금'이 없었다]

경제 파탄 직전인 2014년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량은 세계 10위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등이 더 많은 석유를 수출한다. 이 나라들도 베네수엘라처럼 석유 의존도가 높다. 그러나 저(低)유가로 경제가 몰락하진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몰락 배경에는 석유 외에 다양한 요인이 있다. 우선 과도한 정부 지출이다. 차베스·마두로 정권은 복지 지출을 계속 늘리면서 만성적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산업 발전은 뒤로 밀렸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재정 적자는 두 정권을 거치며 매년 늘어나 작년 기준 GDP 대비 37%를 기록했다.

정부의 지나친 시장 통제 역시 투자 환경을 저해하면서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베네수엘라는 가격 인상을 근거로 기업의 자산을 몰수할 수 있는 법률을 시행 중이다. 최근 10년간 P&G, 클로락스, GM 등 이곳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이 이 법에 따라 자산을 몰수당했다. 국제재산권연대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재산권 보호 순위는 2017년 기준 127국 중 126위로 밑바닥이다.

함께 저유가를 겪은 중동 산유국들은 유가 상승기에 쌓아놓은 돈으로 위기를 버텨냈다. IMF에 따르면 2015년 걸프협력회의(GCC) 6국(사우디·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이 쌓아놓은 국부펀드 규모는 1조8000억달러(약 2045조원)에 달했다. 미국 국채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인프라와 부동산에 투자해 얻은 수익으로 유가 변동에 따른 피해를 상쇄한 것이다. 이 국가들은 베네수엘라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근 몇 년간 산업 다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쿠웨이트는 2014년부터 비철금속과 식품 등 제조업 육성에 발 벗고 나섰고, 카타르는 2017년부터 의약품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바레인은 금융업에 눈을 돌렸다.

☞볼리바르 혁명

우고 차베스(1954~2013)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한 반미 사회주의 운동. 시몬 볼리바르(Bolívar)는 '남미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리는 독립운동 영웅으로 19세기 초 스페인에서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 지역을 독립시켰다. 차베스는 볼리바르 이름을 붙인 자신의 정치·사회적 운동이 자본주의·공산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격한 반미와 국유화 등 포퓰리즘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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