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원자력 원로가 느낀 모욕

입력 2019.04.17 03:13

최인준 산업2부 기자
최인준 산업2부 기자

"나라로부터 모욕을 받은 것 같습니다."

대전에 사는 80대 김모씨는 최근 기자와 통화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다녀온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1960년대 초 입사해 1996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5년 넘게 원자력연구소(현 원자력연구원)에서 원자력·방사선 시설 안전관리를 책임진 기술자였다. 연구원은 한국 원자력 기술 자립의 산증인이라며 지난 9일 김씨를 정·관계 인사들과 함께 행사에 VIP로 초청했다. 김씨는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도 축하 영상을 보냈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 국무총리는 영상 하나 없고, 축사하러 온 차관도 재만 뿌리고 갔다"며 "행사 끝난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로 대부분이 정부의 원자력계 냉대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의 행사가 열렸던 지난 9일, 최고위직 정부 인사로 참석한 문미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은 운동화를 신고 등장했다. 문 차관은 당일 '원자력연구원 60주년에 훈·포장은커녕 대통령·총리 표창도 없다'는 내용의 기사가 난 것을 의식한 듯, "올해 12월에 있을 '원자력의 날'에 별도의 포상을 하겠다"고 했다. 올해 환갑을 맞은 원자력연구원의 잔칫날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달랑 10명만 과기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지난 50주년 때는 훈·포장을 포함해 수상자가 40명에 달했었다. "축하하러 와서 정부 변명이나 하는 게 영 듣기 불편했다" "투덜대는 원자력계에 '옜다' 하며 상 주고 말겠다는 거냐"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이들 모두는 30년 넘게 대학·연구소·기업에 몸담은 분들이었다.

문 차관은 행사 종료 20여분을 남기고 아예 식장을 떠나버렸다. 그가 남긴 연말 별도 포상 약속 역시 '공수표'가 될 공산이 다분하다. 문 차관이 언급한 '원자력의 날'은 매년 원자력 산업 종사자에게 포상하는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을 말한다. 이명박 전(前) 대통령 때인 지난 2009년 12월 27일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을 기념하기 위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다. 원자력의 날 행사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과기부가 격년으로 행사를 개최하는데 올해 주관 부처는 과기부가 아니라 산업부다. 수상자 선정은 주관 부처에서 한다. 취재 결과, 문 차관은 산업부와 '별도의 포상'을 사전에 협의한 적이 없다고 한다. 행사 주관 부처도 아닌데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덜컥 추가 포상부터 약속한 셈이다.

김씨는 원전 기술자로서 구겨진 자존심을 이렇게 말했다. "원자력연구원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기관 1호이기도 합니다. 과학 강국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원전이 싫다고 해도 정부가 기념일에 흔한 축사는 고사하고, 연구자를 이렇게 푸대접해선 안 될 일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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