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임시정부 법통론으로 쏠리는 상황에서 저 스스로 비겁했다고 생각합니다."

12일 서울 동대문구 역사문제연구소 5층 강당.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의 공동 학술 대회에서 좌파 역사학자들의 자기반성이 쏟아졌다. 발표자로 나선 이용기 한국교원대 교수는 "보수 진영의 '1948년 건국설'이 제기됐을 때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침묵 속에 방관하든가 '1919년 건국설'에 동조했다. 지나고 보니까 동의하지 않는데도 왜 '1919년 건국설' 뒤에 숨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12일 서울 동대문구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서 역사학자들이 종합 토론을 하고 있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임시정부 법통론’에 비판적 의견이 쏟아졌다.

이날 주제는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 전쟁의 함정'. 학술 대회가 열린 시점이 묘했다. 문재인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식(11일)이 끝난 바로 다음 날 학술 대회가 열린 것이다. 토론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임정 법통론은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가 정통을 잇는다는 것도 진실에 배치된다"고 말했다. 윤상원 전북대 교수는 "임정 법통론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임정 법통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내몰려 스스로 임시정부주의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좌파 역사 단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건국론 논쟁과 국정 교과서 등 쟁점마다 보수 진영과 충돌했다. 특히 보수 진영의 '1948년 대한민국 건국론'에 맞서기 위해 현 정부와 이 역사 단체들은 임정이 수립된 해인 '1919년 건국론'을 주장하고 임정 법통론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날 대회에서는 정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이 역사 단체들의 급격한 노선 전환은 역사를 현실 정치에 동원하는 현 정부의 '역사 정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적 뿌리는 100여 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이른다"는 문 대통령의 지난 2월 육사 축사도 도마에 올랐다. 이 단체들은 대회 취지문에서 "해방 이후 한국의 군대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을 중심으로 출범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는 암흑의 인식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문체부 산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추진 중인 상설전시관 개편에 대해서도 "전시 내용이 '건국 100년'이라는 구도에 맞춰 있다면 더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좌파적 민중 사학자들은 '임정이 독립운동 단체의 하나에 불과했다'고 평가 절하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투쟁에 관심을 쏟았다. 2000년대 건국론 논쟁이 불거지자 보수 진영에 맞서 임정 옹호에 나섰지만, 최근 '임정 재(再)비판'으로 돌아간 것이다. 또 일부에선 임정 법통론을 옹호할 경우 향후 남북 관계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