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네 독감 마스크 줘"… 아프고 싶다고? 날 좋아하는 거지

조선일보
  • 이기호·소설가
    입력 2019.04.13 03:00

    [누가 봐도 연애소설] 독감과 마스크

    "너처럼 아프고 싶어. 감기 마스크를 내게 줘, 예은아."

    민규는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회의가 이어졌고, 점심엔 신규 렌털 대리점 사장들과 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다. 국내 굴지의 정수기와 복사기, 에어컨 회사의 광역 총판 운영팀장을 맡고 있는 민규로선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민규는 식사 중간 예은이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예은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툭 물컵을 쏟아 양복바지를 다 적시고 말았다. 그것이 마치 어떤 징조처럼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 독감과 마스크
    일러스트=박상훈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그는 본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겨우 회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40분은 넘게 걸렸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은이는 계속 받지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민규의 딸 예은이는 그제 오후부터 열이 올랐다. 퇴근길에 영어 학원으로 예은이를 데리러 간 민규는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뺨 부위가 벌겋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마뿐만 아니라 온몸이 마치 한증막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처럼 뜨끈뜨끈했다.

    "예은아, 아파?"

    "응, 목도 따끔거리고 다리도 아파."

    민규는 곧장 대형 마트 부근에 있는 아동 전문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직장 엄마, 아빠들을 위해서 밤 9시까지 진료를 보는 곳이었다. 이 년 전에도 민규는 예은이를 안고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민규와 예은이 둘만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의사는 예은이의 상태를 보자마자 독감 검사 키트를 꺼냈다. 결과는 B형 독감. 의사는 빨간 줄이 그어진 키트를 민규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닷새 동안 격리하셔야 하고요, 타미플루 처방해 드릴게요."

    "격, 격리요…? 그럼 학교는…?"

    "당연히 못 가죠. 저희가 진단서 발급해 드립니다."

    민규는 육 개월 전부터 아내인 혜진과 별거 상태였다. 그것도 보통 별거가 아닌 국외 별거 상태. 혜진은 이 년 전부터 꾸준히 디자인 유학을 말해 왔지만 민규가 반대했다. 아니, 너한텐 그게 좋다지만 나는? 나는 그럼 로마 가서 뭐 하라고? 피자 만들라고? 혜진은 그럼 자기 혼자만 다녀오겠다고 했다. 독하게 마음먹으면 3년이면 끝난다는 말도 했다. 민규는 그것도 반대했다. 아니, 그럼 우리 예은이는? 넌 정말 너밖에 모르는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규 또한 혜진에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혜진이 보낸 포트폴리오만으로도 바로 입학 허가가 났을 정도니…. 하지만 뭐 누군 좋아서 정수기 렌털 회사 다니는 줄 아나? 누군 예술 할 줄 모르나? 민규는 혜진이 계속 고집을 꺾지 않자 '갈 테면 아예 이혼 도장 찍고 가라'고 화를 냈다. 그 정도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혜진은 정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가겠다고 말했다. 민규는 혜진이 로마로 떠날 때까지 이혼 서류를 내밀진 않았지만 서서히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우리 딸, 내가 남부럽지 않게 키울 거야. 민규는 자주 그 말을 중얼거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규는 예은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어제는 결근까지 하면서 곁을 지켰지만, 오늘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죽도 사다 놓고, 과일도 사다 놓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더군다나 타미플루가 좀 독한 약이던가. 그것 때문에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으니…. 왜 나는 옆에 도와줄 사람 한 명 없단 말인가? 민규는 괜스레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현관에서 급하게 신발을 벗던 민규는 무춤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거기에 웬 낯선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예은이의 이름을 부르며 거실로 들어간 민규는 또 한 번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는데, 마스크를 한 예은이가 웬 낯선 남자아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 아빠. 왔어?"

    예은이가 인사하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도 주춤 일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경을 쓴, 머리가 짧은 남자아이였다.

    "너 왜 전화 안 받아? 아빠 걱정했잖아."

    민규는 남자아이는 본체만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침대 옆에 진동으로 해놔서."

    "근데 얜 누구니?"

    민규는 소파에 앉지 않고 계속 거실에 선 채 물었다.

    "응. 우리 반 박지호인데, 문병 온 거래."

    자세히 보니 거실 테이블엔 베지밀 한 병과 하리보 젤리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어 그래. 고맙긴 한데…. 우리 예은인 지금 누구 만나면 안 되는데…. 의사 선생님이 옮는다고 그래서…."

    민규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아이가 곧장 소파 옆에 있던 자신의 책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러곤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예은이 다 나으면 그때 또 보자."

    민규는 남자아이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오자 예은이가 혼자 쿡쿡, 웃어댔다.

    "쟤 진짜 갖고 갔네."

    "뭘?"

    민규는 계속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있으면서 남자아이를 집에 들이다니….

    "내가 쓰던 마스크 말이야. 그걸 자꾸 하나만 달라고 해서…."

    "네가 쓰던 마스크?"

    "응."

    "그걸 왜?"

    "몰라. 자기도 나처럼 아프고 싶다고."

    이기호 소설가
    이기호·소설가
    이것들이 진짜…. 너희들이 무슨 사귀는 사이냐? 니들이 무슨 황순원의 소나기야? 독감 환자 마스크를 왜?

    "학원 가기 싫어서라는데…. 난 알지. 쟤가 날 좋아하는 거."

    민규는 계속 혼자 쿡쿡거리며 웃는 예은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민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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