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때가 돼야 비로소 붓을 쥐다

조선일보
  •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19.04.12 03:13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지인의 안내로 김호석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스무 평 남짓 소박한 화실에서는 혜암(慧菴·1920~2001 조계종 10대 종정) 스님 진영(眞影)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영각이나 박물관에 봉안된 완성품을 친견할 일은 더러 있었지만 제작 중인 진영을 접한 일은 처음이다.

    진영의 옷은 간소화하고 얼굴에 전념했다. 옷을 살리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통로인 눈빛 묘사가 압권이다. 송나라 장승요(張僧繇)가 그린 용 그림에 눈동자를 찍었더니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더라는 화룡점정(畵龍點睛)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진영이란 본래 이영심진(以影尋眞)을 추구한다. 화백은 밖으로 드러난, 그리고 늘 바뀌는 겉모습[影]을 통해 그 인물이 가진 내면 세계와 정신 세계[眞]를 드러낸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이다. 당사자를 제대로 알기 위해 생존 인물은 시간 나는 대로 수시로 찾아가 함께 살았다. 고인은 문집과 기록 영상, 글씨, 사진 등을 통해 대화하고 흔적이 서린 곳을 찾아가고 그 길을 산책하며 좋아하던 것을 같이 음미했다. 그리하여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다시 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붓을 쥐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일도 겪었다. 이십대 시절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았을 때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는 까무잡잡한 마른 스님과 마주쳤다. 대뜸 뭐하는 청년이냐고 묻는 게 아닌가. 그림을 그린다고 대답했다. 되돌아온 말씀이 인상적이다. "죽은 그림을 그리지 말고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당부가 뒤따랐다. 그는 '젊은 법정(法頂·1932~2010)'이었다. 살아있는 그림을 위해 인물 스케치도 하고 사진까지 여섯 장 남길 수 있었다.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으로 화가 지망생의 당돌한 요구에 순순히 응한 결과였다. 열반 후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 안치될 진영을 그릴 때 작업을 위한 기본 자료가 되었다.

    화백은 '인물화의 장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20여 유명인의 진영을 그렸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이상형 초상화와 사실형 초상화 사이의 딜레마였다. 작가가 보는 모습과 후손 혹은 제자들이 원하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람들의 그리움에 응하는 그림을 원했지만 주문한 이는 자기가 기억하는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폈다. 거기에 더하여 흉터나 주근깨, 주름살 같은 것은 최소화된 모습을 요구했다. 그래서 수정본을 포함하여 늘 여러 장을 그리는 비경제적 수고까지 감내한다. 전문가가 볼 때 '진품'은 영각이 아니라 화실에 남아있다고 했다. 의도하지 않은 '작가 소장'이 된 것이다. 먼 훗날 진영 박물관이 생긴다면 모든 인물화를 동시 전시할 예정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하긴 요즈음만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송나라 임제종 황룡파의 개산조인 황룡혜남(黃龍慧南·1002~1069) 선사의 초상화를 대하는 제자들의 상반된 태도가 이를 말해준다. 진정극문(眞淨克文)은 "이 진영은 우리 스승님을 그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흥분했다. 하지만 잠암청원(潛庵淸源) 스님은 진영을 보면서 마냥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이것이 진영이 가진 고금의 숙명이다. 동시에 진영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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