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조양호 회장의 죽음을 바라보는 다른 視線

조선일보
입력 2019.04.12 03:17

그의 죽음이 언론과 시민단체, 정권이 합세한
'인민재판'의 결과가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인터뷰한 적 있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난리가 난 뒤였다. 나는 민감한 질문이 배석한 참모들에 의해 제지당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응접실에는 둘만 남아 1:1로 했다.

그는 소탈했고 조리 있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어떤 대목에서 그가 단순한 상식을 모르고 있다는 데 놀랐다. 상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줄 아는 게 어른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수용될지를 예측해 자신의 언행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만 말했다.

장녀(長女)의 '땅콩 회항' 문제를 꺼냈을 때 "내가 딸에게 '객실 서비스가 문제 많으니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딸이 승무원을 내리게 한 것은 정말 잘못됐지만 그전에 서비스 규정 위반을 지적한 것은 옳았다"고 답변했다. 규정을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내 딸이 많이 부족했다. 다시 사과드린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그를 결정짓는 평가는 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대한항공을 얼마나 잘 이끌어왔는지 기업 총수로서의 평가가 우선 돼야 한다. 성숙한 인격과 도덕성, 인문학적 소양까지 갖추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부차적이다. 사실 그런 완벽한 인간은 기업 경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공계 출신으로 기계에 밝았다. 한때 대한항공은 추락 사고가 주기적으로 발생해 문제 많은 항공사로 찍혀 있었다. 그는 '규정대로'를 내세웠다. 비상 상황에서 관제탑과의 교신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영어 잘 못하는 고참 조종사들을 탈락시켰다. 그 뒤로 추락 사고는 끊겼다. 그는 업무 하나하나를 따지는 스타일이었다. 좋아할 만한 보스 유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대한항공을 세계 14위 항공사로 성장시켰고, 3만여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술·담배를 못 했고 저녁 모임에 재미없는 사람으로 분류됐다. 풍경 사진을 찍거나 첨단 무기 백과사전을 보는 게 취미였다. 그는 "한국은 자본주의이면서 자본주의가 아닌 문화가 있다. 재벌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내가 해도 되는 범위를 정해 놓았다. 다른 잡념이 안 생기게 워크홀릭처럼 일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현 정권에서 최악의 재벌, 우선 때려잡아야 할 적폐 대상으로 찍혔다. 그의 가족이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땅콩 회항'이 잊힐 만하자 작년 봄 둘째 딸의 '물컵 갑질' 사건이 터졌다.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한 광고업체 직원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녀의 비행(非行)은 나중에 검찰에서 무혐의로 종결됐다. 법(法)대로 하면 그 수준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어떤 잔혹한 범죄자보다 그녀가 더 악인처럼 받아들여졌다.

대다수 언론은 군중의 적개심에 불을 붙였다.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당시 일지(日誌)를 보면 4월 18일 경찰의 광고 대행사 압수 수색, 4월 19일 대한항공 본사 압수 수색, 4월 20일 공정거래위의 기내면세품팀·계열사 현장 조사, 4월 21일 관세청의 자택과 인천공항 압수 수색, 4월 23일 관세청의 전산센터와 한진관광 압수 수색…, 11개 다른 정부기관이 교대로 자택과 본사 등을 압수 수색했다. 8개월 동안 18번의 압수 수색 영장이 발부됐다. 일가족은 모두 조사 대상이 됐고, 포토라인에 선 횟수는 14회였다. 이 모두가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기록일 것이다.

그에게 날마다 이런 상황을 보고해온 대한항공 임원은 "맨정신으로 버텨내는 게 신기했다. 원망·분노 같은 개인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간혹 '언론의 반응이 어떠냐?'를 묻는 데 그쳤다. 지치고 늙어 보였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초 미국으로 갈 때도 "바깥 현장을 둘러보고 좀 쉬다 오겠다"고만 말했다. 핵심 임원들조차 그가 폐섬유증을 앓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미국에서 치료받는 동안 참여연대는 국민연금에 '대한항공 주주권 행사'를 촉구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장은 복지부 장관이며, 위원 중 5명이 정부 부처 차관이었다. 그럼에도 주주권 행사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머뭇거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공격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국민 노후 자금의 수익을 우선해야 할 국민연금이 정치적으로 민간기업에 개입할 수 있는 무기(武器)가 됐다.

미국에서 수술을 마친 그는 핵심 임원들에게 '주총(株總)에 회사의 사활이 걸렸다'는 메일을 보냈다. 원기 회복한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주총에서 그는 밀려났다. 열흘 지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죽음이 언론과 시민단체, 정권이 합세한 '인민재판'의 결과가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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