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文 정부가 노무현의 명예를 회복시킨 방법

조선일보
  • 김창균 논설주간
    입력 2019.04.11 03:17

    나라의 뒷걸음질 본 국민들… FTA, 제주기지 盧 결단 재평가
    80년대 이념에 갇힌 文 정부, '盧의 진화' 돋보이게 만들어

    김창균 논설주간
    김창균 논설주간

    요즘 들어 부쩍 노무현 정부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말을 듣게 된다. "문재인 정부를 겪고 나니 노무현이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문 정부에 대해 실망하면서 그 전신(前身) 격인 노 정부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호전되는 묘한 현상이다.

    노무현을 재평가한다는 사람들은 "나라에 꼭 필요한 일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하면서 결단했다"는 점을 꼽는다. 한국과 미국을 경제 공동체로 묶어 낸 한·미 FTA가 대표적인 경우다. "반미면 어떠냐"는 구호 덕을 톡톡히 봤던 대통령으로서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만일 중국과 일본이 먼저 미국과 시장을 합칠 경우 우리 처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노무현 너 그때 뭐했나'라는 얘기를 듣지 않겠나"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10년 후, 20년 후 대한민국의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대신 "적더라도 함께 나누는 세상, 배고프더라도 함께 먹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나라'로 바꿔가고 있다. 집권 2년 만에 5세대(5G) 이동통신 경쟁력은 공동 1위에서 3위로 내려앉았고, 세계가 부러워하던 원자력 생태계는 붕괴 직전이다. 정권 눈 밖에 난 기업들은 권력기관들의 샌드백 신세다.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 혼내 주고 왔다" "여당이 왜 기업 걱정하느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이런 나라에서 기업이 혁신하고, 경제가 도약하면 기적일 것이다.

    우리가 쓰는 원유 99.8%, 곡물 100%가 통과하는 제주 남방 해상교통로는 나라의 생명선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 물길을 놓고 중국, 일본과 다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였다.

    문 정부 2년 동안 키리졸브, 독수리, 을지 등 3대 한·미 연합훈련이 모두 폐지됐다. 적의 도발 조짐을 사전 감지할 수 있는 전방 항공정찰, 서해 5도 포 사격 훈련도 금지됐다. 북의 오판을 막아온 장치들을 족집게처럼 골라내 무력화시켰다. 우리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데 북이 싫은 기색을 보일 리 없다. 그렇게 조성된 일시적 긴장 완화를 "평화가 왔다"고 분칠한다.

    노 전 대통령은 지지층의 FTA 반대에 "이 나라가 진보만 사는 나라냐"고 했고, 제주 해군기지 반대엔 "평화는 무장을 통해 지켜지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교통 대란이 우려됐던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 자신이 내걸었던 지역 균형 발전과 배치되는 손학규 경기지사의 파주 LCD 공장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야당의 차기 주자들을 왜 키워주느냐"는 참모들의 쩨쩨한 반대에 휘둘리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야당이 집권했던 이명박, 박근혜 10년을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우겠다는 것이다. 전 정권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절멸하는 제노사이드(인종학살)다. 4대강 보를 개방해도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데도 굳이 해체하겠다며 데이터를 왜곡하고 1000억원 가까운 예산까지 쓰려 한다. 문 정부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으로 폐기'(CVID)하려는 대상은 북핵이 아니라 전 정권이다.

    문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펴낸 '문재인이 답한다'를 읽으면서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의식화 교재를 다시 펼쳐든 기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도 "정신 연령이 386세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80년대 대학생 인식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었다. 그랬던 노 전 대통령은 국정 경험을 쌓으면서 생각이 진화했다. 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 같은 정책을 내놓은 것은 집권 후반기였다. 이 무렵 "1980년대에 읽었던 진보 진영 책들이 현실적 효용성에서 문제가 많더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그가 쓰러졌던 곳에서 그가 가던 길을 마저 가야 한다"고 했다. '노무현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다. 문 대통령이 그토록 질색했던 정치를 결심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되도록 노 전 대통령이 출발했던 지점을 맴돌고 있다. 3·1절 기념식에서 외친 '친일 잔재 청산론'이 좋은 예다. 1980년대 이념에 갇혀 화석화된 문 정부가 '노무현의 진화'를 돋보이게 한다. 전임자의 업적을 계승 발전해서 "그가 옳았다"는 말을 듣는 대신 전임자보다 못난 모습을 보여 "그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말을 듣는다. 노무현의 명예는 그렇게 역설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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