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조 회장 급서, '적폐 청산' 희생자 몇 명째인가

조선일보
입력 2019.04.09 03:20

자산 규모 재계 14위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8일 급서했다. 폐질환을 앓았던 그는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반대로 등기이사직을 박탈당한 뒤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그는 지난달 말까지 수시로 회사 업무 보고를 받을 정도의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급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현 정부 들어 대표적인 '적폐 기업인'으로 찍혀 전방위 압박을 받아왔다. 작년 4월 조 회장 차녀의 '물컵 갑질' 사건이 터진 이후 조 회장과 그의 가족은 범정부 차원의 사정(司正) 총공격을 받았다. 검찰·경찰은 물론, 관세청·공정위·교육부·고용부·복지부 등 11개 기관에서 25건의 조사를 받았다. '물컵' 사건과 관련도 없는 별건(別件) 조사로 확대돼 밀수, 가정부 불법고용 같은 온갖 사안으로 망신을 주었다. 18차례에 걸쳐 한진그룹 계열사 압수수색이 진행됐고, 조 회장 일가는 모두 14번 검찰·경찰·법무부 등의 포토라인에 서야 했다. 관세청장이 "조 회장 자택에 '비밀의 방'이 있다"고 공개 발언했지만 실제 있지도 않았다. 마녀사냥, 인민재판이 따로 없었다. 한 기업인 가족을 상대로 이렇게 국가 기관이 총동원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정작 물컵 사건에 대해선 무혐의로 결론 내리고 기소하지도 않았다. 가족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이 모두 기각되자 칼날은 조 회장으로 향했다. 검찰은 항공기 장비와 기내 면세품 구매 과정에서 수백억원대 횡령이 있었다며 조 회장을 기소했다. 국민연금은 '주주 가치 훼손'을 이유로 조 회장을 대한항공 이사회에서 축출했다. 지병이 있는 환자가 이러고도 사망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대기업 오너 가족의 '갑질'이나 부도덕한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조 회장 가족은 전직 회사 임원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을 정도로 처신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도덕적인 비난과 법에 의한 처벌은 엄격히 구별돼야 한다. 법치는 어떤 행위에 범죄 혐의가 있을 경우 그 혐의를 입증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반대로 특정 인물을 먼저 찍은 뒤에 무조건 잡겠다는 목적을 갖고 법을 이용해 먼지 털기를 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다. 조 회장 사망에 대해 재계에선 '간접 살인'이란 개탄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무리한 얘기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정부 들어 '적폐 청산' 대상이 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4명이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변창훈 전 서울고검 검사, 국정원 소속이었던 정모 변호사, '방산 적폐'로 찍혀 수사받던 기업 임원 등이다. 그런데 이들의 혐의는 애매하거나 입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대중의 분노에 야합하는 공권력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조 회장의 죽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인 법치주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되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