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워싱턴의 벚꽃은 그 뿌리를 봐야 한다

조선일보
  •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입력 2019.04.06 03:05

    문 대통령 訪美 때 벚꽃 절정… 그 뿌리는 '가쓰라-태프트밀약'
    국제질서 냉엄한 현실 직시하며 북한 비핵화 다뤄야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다음 주쯤이면 워싱턴의 벚꽃이 절정에 달할 것이다. 워싱턴시 당국은 해마다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벚꽃 축제'를 열어서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워싱턴 관광 수입의 3분의 1가량을 이 기간에 벌어들인다고 한다. 포토맥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인공 호수(타이들 베이슨)를 따라 수천 그루의 벚꽃이 완전히 개화하면 그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벚꽃이 피면 일본 대사관과 기업들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미·일 관계의 끈끈함을 과시하려는 세미나가 줄을 잇고 축제를 후원하는 일본 기업들의 간판이 워싱턴 시내 곳곳에 들어선다. 벚꽃만큼 화려한 일본의 '소프트 외교'가 이때 빛을 발한다.

    그런데 워싱턴 벚꽃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우리의 아픈 과거를 만난다. 러일전쟁의 전운(戰雲)이 짙어져 가던 1904년 초 고종은 두 나라 간의 분쟁에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허약한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자기 고백'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극도로 경계했던 미국은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용인했고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다.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 도움을 호소했지만 미국은 일본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1905년 7월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밀약'이 맺어졌다.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해 뒤 일본은 3000그루의 벚나무를 미국으로 옮겨가 뿌리를 내리게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도쿄로 건너가 밀약을 맺었던 '윌리엄 태프트'였으니 그 의미를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이 벚나무들은 굳건한 미·일 동맹을 상징하는 거목(巨木)으로 성장했다.

    다음 주 워싱턴을 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도 이 화려한 벚꽃 군락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저 그 외면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고 지나칠지, 아니면 그 이면(裏面)의 역사를 성찰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지금 문 대통령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완전한 비핵화와 빅딜로 선회하면서 우리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쪽에서는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노골적인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을 다녀온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은 "우리와 미국의 최종 목표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회담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 듯하다. 미국이 요구하는 중재안을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동안 쌓인 미국의 불신이 해소될지도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쩌면 미국은 "한국은 지금 누구 편인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올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기 미국은 동아시아 강대국 사이에 낀 한반도의 운명에 여러 차례 개입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 아픈 과거로 남아 있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용인했고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는 데 소련과 합의한 것도 미국이었다. 그런가 하면 목숨 바쳐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문 대통령의 이번 방미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는 것은 한·미 간 애증(愛憎)의 역사에 '북한 핵'이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아픈 역사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