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생 모은 돈이 백석의 詩 한 줄만 못합니다

입력 2019.04.06 03:00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어수웅·주말뉴스부장
꽤 오랜만에 성북동 길상사(吉祥寺)를 찾았습니다. 봄이더군요.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잿빛 건물을 노랑으로 물들였고, 초파일 한 달 앞둔 오색 연등은 푸른 하늘에 분방한 무늬를 새겼습니다. 도심의 절경이었습니다.

불경스러운 고백이지만, 불도의 도량보다 연애의 성지로 길상사를 편애한 시절이 있습니다. 이날의 동행은 연애의 달인으로 이름난 후배. 하지만 15년 연하의 달인은 길상사가 처음이라 하더군요. 그와 함께 절 안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2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공덕비가 객을 맞았습니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

길상화(吉祥華)는 고 김영한(1916~1999) 여사입니다. 젊은 시절 기생이었고, 중년에는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으며, 노년에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헌납해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한 주인공. 이전 세대에게는 꽤 알려졌지만, 생전의 할머니에게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진향(眞香)으로 불리던 20대 기생 시절에 만난 시인 백석(1912~1996). 함흥 영생고보 영어 선생이던 백석이 동료 교사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처음 봤다고 하죠. 공덕비에는 시인의 절창을 함께 새겼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말입니다.

육신의 옷을 벗기 전 대원각 여장부는 법정 스님에게 요정의 7000평 땅과 40여동 건물을 시주합니다. 결심을 발표한 날, 세속적 질문과 현답이 이어졌죠. "아깝지 않았습니까" "내 평생 모은 돈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합니다. 내 소원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저 팔각정에 있는 종을 달아 힘껏 쳐보는 일입니다…."

이번 주 읽은 책 중에 2018년 퓰리처상 수상작 '레스'(은행나무 刊)가 있습니다. 미국 작가 앤드루 숀 그리어의 장편 소설. 쉰이 되어도 문학과 연애를 포기하지 못하는 '바보 사랑꾼' 아서 레스의 유머러스한 참회록이랄까요. 레스는 말합니다. 낭비일지언정, 20대는 사랑해야 한다고. 부동산과 주식은 50 넘어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철없는 충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있죠. 스무 살 때 연애 못하는 사람이 쉰 넘어 잘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 4월의 첫 주말입니다. 봄도 연애도 만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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