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크레인을 움직인다… 로테르담 항구, 無人혁명

조선일보
  • 로테르담=성정욱 탐험대원
  • 취재 동행 김승재 기자
    입력 2019.04.03 03:01

    [청년 미래탐험대 100] [11] 강소국 네덜란드의 저력
    스마트 항구 찾은 26세 성정욱씨

    유럽 최대 항만인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는 영화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지난달 찾은 로테르담항(港)의 마스블락테(Maasvlakte) 2터미널엔 대형 크레인이 컨테이너 수백 개를 일사불란하게 옮기고 있었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로 움직이는 크레인과 화물차의 기계음만 들릴 뿐 고요하다. 북해(北海)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스친다.

    거대한 철제 크레인은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에 실린 컨테이너를 성큼 들어 올려 항만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크레인의 키는 144m. 50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철제 기계는 묵묵한 하인처럼 배에서 땅으로 컨테이너를 하나씩 옮겼다.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크레인이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 물어볼 사람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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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 스마트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의 APM터미널에서 무인 화물차가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다. 작은 사진은 무인화 전인 2010년 항구 풍경. /APM터미널·유튜브
    이곳 로테르담 항구는 세계 최초로 무인 자동화 하역 시스템을 도입(2015년)한 곳이다. 사람의 지시를 받아 크레인이 배에서 컨테이너를 내려놓는 대신 인공지능(AI)이 알아서 '교통정리'를 하고 초대형 로봇(크레인)이 작업을 완료한다. 이런 무인 스마트 항구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를 모아 추진 전략을 세우고 노조와 길게 대화했다.

    영·호남을 합친 정도 크기의 땅에 인구 1700만 명 수준인 네덜란드가 강소국(强小國) 입지를 굳힌 저력을 나는 이 항구에서 볼 수 있었다. 키워드는 AI를 활용한 치밀한 무인화, 그리고 그 변화를 가능케 한 치열한 인간 설득이었다.

    로테르담항 터미널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항구라면 으레 하역 노동자가 북적거리고 고함이 분주하게 오가리라 여겼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곳에서 인간은 육체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그 기계를 움직이는 논리와 규칙을 마련하는 역할에 매진하고 있었다.

    ◇24시간 움직이는 항구, 그 힘은 로봇·AI

    로테르담항의 크레인엔 어디를 봐도 조종석이 없다. 컨테이너를 배에서 육지로 내리는 이른바 STS(ship-to-shore) 크레인 몸체엔 카메라 5대가 서로 다른 각도로 달려 있었다. 로테르담항의 조 베르부르크 공보관은 "크레인 움직임의 80%는 완전한 자동화로 이뤄진다"고 했다. 인간이 하는 20%의 업무는 중앙 관제센터에서 스크린을 보며 조이스틱을 조종해 특정 컨테이너를 집어 '클릭'하는 정도다.

    무인화 시스템이 적용되기 전인 2010년대 초반까지 로테르담항의 풍경은 다른 항구와 다르지 않았다. 하역장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인부가 가득했다고 한다. 인부들이 무전기와 수신호를 이용해 소통하는 크레인 조종석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금의 항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로봇 나라를 연상케 했다. 역할을 분담받은 로봇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로봇 1호는 무인 크레인이다. 화물선에서 컨테이너를 옮긴다. 2호는 '납작 로봇'인 무인 화물차겠다. AGV(Automated Guided Vehicle)란 이름으로 불린다. 컨테이너를 올려놓기 좋은 모양의 납작한 몸체에 바퀴 네 개만 달렸다. 이 똘똘한 로봇 차는 항구의 교차로에서 다른 AGV를 만나면 알아서 피했고, 교차로에서 마주치면 눈치껏 양보해가며 '엉킴'을 방지했다. '더 느린 차가 양보하라'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스스로 감지해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3호도 있다. 레일형 자동화 크레인(ARMGC)이다. 뒤집은 U자(П) 형태로 생겨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ARMGC는 납작 로봇이 가져다준 컨테이너를 야적장에 쌓는 일을 알아서 한다.

    ◇'24시간 일하는 로봇을 어찌 이기나'

    로봇과 AI가 일하는 항구는 인간미는 떨어질지언정 효율성 면에선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다. 하역 작업 시간은 40% 줄고 인건비·연료비는 37% 감소했다. 이런 요인이 모여 전반적인 생산성은 40% 올라갔다. 최저임금이나 법정 근무 시간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로봇은 주 7일, 하루 24시간 일할 수 있으니까.

    신나게 구경을 하다가 순간 섬뜩했다. 로봇끼리 대화하고 직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에너지까지 공수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읽은 이런 얘기가 떠올랐다. '미래의 공장엔 생명체 두 개만 있을 것이다.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 개의 역할은 사람이 기계를 부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 사람의 역할은 개에게 밥 주는 것.' 로테르담 해양물류대 마리올린 켐프 교수(물류공학)는 이런 나의 공포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재래식 항구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점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로봇의 설계도,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사람이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

    ◇15년 걸린 '인간 설득'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저항은 없었을까. 졸업생 상당수가 로테르담항에 취업한다는 로테르담 해양물류대를 찾았다. 찬탈 발렌틴 항만관리학 교수는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노조의 반발은 로테르담항에도 거셌지만 토론과 설득을 통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자동화를 하면 일부가 일자리를 잃지만 자동화를 하지 않으면 다른 항만에 밀려 모두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공감대는 15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로테르담항만공사는 '스마트포트'란 별도 법인을 만들어, 무인화와 친환경 항구 조성 등을 위해 물류·에너지·인프라·항만도시·전략 등 5부문에 총 70여개 프로젝트를 포함한 로드맵을 수립해 왔다. 참여한 기관만 에라스뮈스대, 머스크(해운사), DHL(물류 회사) 등 150곳이 넘는다.

    한국이 '최신 항구'로 내세우는 부산·인천 신항 등은 일부 야적장 부문만 자동화 설비를 갖춘 반(半)자동 항만에 머물러 있다. 노조의 반발이 완전한 스마트 항구를 구축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한때 한국에 밀렸던 중국은 이미 11개 항만을 '자동화 도입 스마트 항만 시범사업장'으로 지정해 무인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로테르담에서 만난 항만공사 관계자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자동화인가 아닌가'는 이제 한가한 질문이에요. 현재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이거란 말입니다. '자동화인가 죽음인가!'"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네덜란드 같은 강소국으로 가는 길을 살짝 본 느낌

    드라마 '미생'에는 종합무역상사 회사원들이 요르단에 중고차를 팔려고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국 시장에선 잘 팔리지 않은 중고차가 요르단에서는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고 무역에 푹 빠진 경영학 전공 대학생입니다.

    우리나라는 대외 의존도가 80%가 넘습니다. 그러나 '무역의 관문'인 항구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반면, 과거 바다를 제패한 '무역 강국' 네덜란드는 지금 항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블록체인 등을 활용해 자동화·친환경 항만으로 거듭난 로테르담항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현장에서 본 로테르담항은 끊임없이 혁신하고 있었습니다. 정부·기업·대학이 수시로 소통해 새 도전 과제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기업은 정부 관계자를 만나길 꺼리지 않았고, 노동조합도 혁신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한국도 네덜란드 못지않은 강소국(强小國)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가야 할까요. 이번 경험을 밑거름 삼아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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