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떠나는 발길 무거운 58년 개띠들

조선일보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입력 2019.04.02 03:17

    퇴장하는 베이비부머, 민주화 취하고 좌경화 버려
    '386 혁명' 무산시킨 넥타이부대, '바보처럼 열심히 산 마지막 세대'
    대한민국의 탈선과 역주행 방임하는 '포스트부머'에 의구심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요 몇 년 사이 우리 사회 각 영역에서 이른바 '58년 개띠'들이 속속 정년을 명(命) 받고 있다. 58년 개띠는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부머(baby-boomer) 연령 집단의 핵심으로서 약 100만명이 태어났다가 현재 76만여명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선 현장에서 등 떠밀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금 개띠'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무릇 사람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데 베이비부머를 바라보는 신세대의 시선은 별로 곱지 않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눈에 이들 기성세대는 한마디로 '꼰대'다. 하긴 이런 소리를 듣는 게 딱히 억울한 일은 아니다. 그게 세상의 진화 법칙이기 때문이다. 꼰대세대 입장에서 최근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가 탐탁지 않은 것 또한 놀랍지 않다. 늙은이들이 '요즘 젊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태곳적부터의 일이었다.

    인구학적으로 볼 때 베이비부머의 대를 잇는 우리 사회의 주축 연배는 이른바 '386세대'다. 그리고 지금은 누가 뭐래도 '운동권 천하'다. 10여 년 전 집권 1기에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로 규정했던 그들은 집권 2기를 맞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로 급속히 개편 중이다. 떠나는 58년 개띠들의 발길이 무거운 것은 이런 '하수상한 시절' 때문이다. 주류 베이비부머 세대가 피와 땀으로 헌신해 왔던 세상과 너무나 다른 현실이 벼락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볼 때 58년 개띠 내지 베이비부머 세대는 1980년대 원조 386그룹이 시도한 급진적 체제변혁의 꿈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이른바 중산층 '넥타이 부대'의 결정적 공헌은 민주화는 취하되 좌경화는 막아낸 일이다. 말하자면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역사적 오류를 제압한 것이다. 386 운동권의 입장에서는 친북 사회혁명이 코앞에서 무산된 셈이었지만, 베이비부머야말로 산업화와 민주화 사이에 부드러운 연결고리를 만들어 냈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세대임이 분명하다.

    베이비부머 세대 입장에서 당장 불편한 존재는 물론 현재 386 집권세력이다. 하지만 보다 길게 염려스러운 것은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포스트부머(post-boomer) 세대의 전반적인 문화와 정서, 그리고 가치관이다. 베이비부머가 볼 때 포스트부머는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곧잘 나타나는 '달콤한 인생(dolce vita)' 세대의 한국판(版) 같기도 하고, 18세기 조선의 일시적 풍요를 탐닉했던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최신판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들이 오늘날 대한민국호(號)의 탈선과 역주행을 결과적으로 수용, 방임 혹은 묵인하는 듯한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포스트부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근검절약이나 자수성가의 절박함과 거리가 멀다. 소비주의에 익숙하고 문화자본도 풍부한 편이다. 글로벌, 디지털, 메트로폴리탄 세대 또한 바로 그들이 시작이다. 다분히 개인주의적이어서 인간관계는 비누처럼 매끄럽고 위생적이다. 남들 앞에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지향을 세련되게 에두르는 가운데, 이른바 '강남좌파'의 온상이기도 하다. 의리보다는 재미, 열정보다는 이익을 중시하는 성향은 포스트부머 엘리트들의 생존법이자 처세술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58년 개띠 세대의 퇴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 시대의 확실한 고별을 상징할지 모른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1925년에서 1930년 사이에 출생한 미국의 '공민세대(civic generation)'와 닮았다. 미국 역대 어느 세대에 비해 그들은 가족이나 국가 같은 공동체적 가치에 충실했다. 투표율이 가장 높았고, 사회활동이 가장 왕성했으며, 책과 신문을 가장 열심히 읽었고, 이웃에게 가장 많이 베푼 것이 바로 그 세대였다. 1928년생 저명(著名)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우리는 바보처럼 열심히 살았던 마지막 세대"라고 회고할 정도다.

    어쩌면 우리의 베이비부머도 대한민국의 마지막 애국세대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 말하는 오늘날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키우기 위해 순진하게 살아왔던 기성세대들의 끝자락임이 틀림없다. 자부심은커녕 졸지에 적폐의 낙인까지 안은 채 58년 개띠들이 조용히, 그리고 줄줄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다. 정녕 우리는 여기까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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