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본 어르신이 "뭐래는 거여?"했다면… 실패작입니다

조선일보
  • 양승주 기자
    입력 2019.03.25 03:00

    제29회 이해랑연극상 고선웅 "좋은 연극이란 쉬운 연극…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죠"

    "제가요? 아…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제29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식을 알렸을 때, 수화기 너머 연출가 고선웅(51)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손만 대면 히트작이 나오는 스타 연출가이자, 동아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차범석희곡상 등 굵직한 상들을 휩쓴 그에게도 이해랑연극상의 무게는 남다른 것이었다. 지난 21일 서울 성북동 극단 '마방진'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내가 이 상에) 적당한가' 되묻고 있다. 이해랑연극상은 뭔가 굉장한 업적을 이룬 분들에게 어울리는 상인데, 난 아직 노정에 있는 사람이니까…"라고 했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제29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고선웅이 극단 사무실에 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멜랑콜리아’ 앞에 섰다. 그림 속엔 극단 이름인 ‘마방진’이 그려져 있다. 그는 “연극은 공동의 창작물이다. 그래서 연극을 두고 ‘내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제29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고선웅이 극단 사무실에 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멜랑콜리아’ 앞에 섰다. 그림 속엔 극단 이름인 ‘마방진’이 그려져 있다. 그는 “연극은 공동의 창작물이다. 그래서 연극을 두고 ‘내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196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글 쓰고 '개똥철학'에 잠기길 좋아했다. 연극 인생은 대학에서 시작됐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들어간 연극 동아리. "시골 촌놈이 연극이란 걸 처음 보기도 했고, 선배들과 밤새도록 연극 얘기를 하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어요. 방학 땐 아예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죠." 졸업 후 광고 회사에 취직했지만, 연극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4년 만에 사표를 냈고, 집과 국회도서관을 오가며 한 달에 한 편씩 희곡을 썼다. 그러다 1999년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다. "일종의 면허증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이 길을 계속 가도 되겠다'는 위안 내지 확신을 얻은 거죠."

    2005년 극단 '마방진'을 창단해 본격적으로 연극에 뛰어들었다. "정사각형 속 숫자들의 가로·세로·대각선 합이 항상 같은 것처럼, 연극을 만드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기능은 달라도 항상 일정한 합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다. 각오는 했지만, 극단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대료를 못 내 쫓겨날 뻔한 적도 많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압류 딱지가 사무실 곳곳에 붙은 적도 있다. 그러다 처음 빛을 본 작품이 창단 5년째 만든 '칼로 막베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발칙하게 비튼 이 연극은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범죄자들을 칼로 막 베어버리는 '막베스'가 주인공인 무협 액션극이다.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이후 '푸르른 날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아리랑' '광화문 연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흥보씨'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원작을 유쾌하게 비틀면서도 메시지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 특기. "다 잘하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공연은 여럿의 협업으로 만든다. 사람들의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잘 모을 줄만 알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쉽고 대중적이다. 두꺼운 '고정 팬덤'을 보유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10년부터 4년간 경기도 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일하며 '좋은 연극은 쉬운 연극'이란 지론을 갖게 됐다. "전국 시군을 돌며 객석을 관찰해 보니 연극 보러 온 어르신들이 '뭐래는 거여?' 하실 때가 잦았어요. 기껏 먼 길을 찾아왔지만, 전혀 즐기시질 못한 거죠. '날은 조금 무뎌질지라도, 누구에게나 쉬운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배우와 스태프들에겐 두 가지를 자주 묻는다고 했다. "너 편해?" "너 행복해?"다. "그들이 편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 나와요. 이제껏 잘된 작품도, 잘 안된 작품도 있었지만, 항상 좋은 마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겐 좋은 작품들입니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피터 브룩을 존경하는 예술가로 꼽으며 "자기 분야에서 오래도록 버티는 것 이상의 웅변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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