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치익치익 소리와 함께 고기 내음 물씬 밥상 물린 뒤엔 '불끈'… 어른의 맛

조선일보
  • 정동현
    입력 2019.03.22 14:45

    [정동현의 pick] 돼지불백 편

    서울 마천동 '일도불백'

    정동현
    부대 주방에 선임 조리병은 두 명이었다. 하나는 제대를 앞둔 병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상병을 단 터였다. 이병 계급장을 단 나는 그 둘이 이쪽을 가리키면 이쪽으로, 저쪽을 가리키면 저쪽으로 갔다.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혀봐."

    제대를 한 달 앞둔 때, 병장이 상병에게 말했다. 드디어 메뉴 결정권을 넘기겠다는 신호였다. 상병이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큰 솥 앞에 섰다. 한 3분 정도 '뭘 하지' 같은 혼잣말을 하더니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돼지 불고기를 잘해주셨거든."

    그 상병도 겨우 스무 살이 갓 넘은 터였다. 아마 긴장감에 누구에게라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그저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상병은 해동한 돼지고기 전지(앞다리살)를 통째로 솥에 쏟아 부었다.

    "간장으로 간하고 마늘이랑 생강 넣고 나중에 파로 마무리하면 되는데 말이지."

    얇게 썰어 조선간장 양념에 숙성시킨 돼지고기를 석쇠 위에서 빠르게 섞어가며 구워내는 이 집의 대표 메뉴 ‘돼지불백’
    얇게 썰어 조선간장 양념에 숙성시킨 돼지고기를 석쇠 위에서 빠르게 섞어가며 구워내는 이 집의 대표 메뉴 ‘돼지불백’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러면서 상병은 누구에게도 국자를 넘기지 않고 혼자 땀을 뻘뻘 흘렸다. 병장은 뒷짐을 진 채 씩 웃기만 했다. 그러다 간혹 "간장을 좀 더 부어야 할 텐데"라고 툭툭 훈수만 던지는 것이었다. 상병의 낯빛은 그런 말이 톡톡 귓가에 떨어질 때마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뭔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이었다. 기껏 해봐야 군대 식당이었지만 누군가를 먹여야 하는 위치에 선 것이었다. 우리가 먹고 NLL 너머를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밤을 새웠던 것은 소불고기도 아니고 돼지불고기였다. 거기에 '백반'이란 글자를 붙이면 그 이름도 친숙한 '돼지불백'이다. 그렇게 짧게 부르는 이유는 이 '돼지불백' 을 먹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주머니는 가볍고, 또 너무 바빠 제대로 이름 부를 새도 없기 때문인 건 아닐까.

    주머니 가볍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학생들이 자주 찾는 집 중에는 서울 서강대 앞 '마포돼지불백'과 서울대입구 역 근처 '낙성기사식당'이 꼽을 만하다. 둘 다 '가성비'를 따지면 아쉬움이 없다. 하지만 '돼지불백' 역사에 1970년 문을 연 성북동 기사식당 '쌍다리돼지불백'을 빼놓고는 말이 되질 않는다. 시원한 바지락국 한 숟가락, 돼지 전지(앞다리살)와 삼겹살을 섞어 쓴 돼지불고기 한 젓가락이면 속이 시원하고 배는 든든하다. 얇게 썰어 간장 양념에 숙성한 돼지고기는 '이만하면 소고기보다 낫지'라고 큰소리 탕탕 칠 만큼 부드럽고 단맛과 짠맛이 이루는 감각의 균형이 팽팽하다. 상추쌈까지 싸서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면 한나절은 또 거뜬할 것 같다.

    서울 마천동 '일도불백'
    서울 송파구 마천중앙시장 한편에 있는 ‘일도불백’(위 사진). 이 가게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쟁반에 소담히 담아 내오는 찬과 고기를 보면 옛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 송파구 마천중앙시장으로 넘어가면 '일도불백'이 있다. 시장 중앙에 작은 간판을 내건 이곳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은 아니다. 그러나 근처 시장 상인들은 이 집에 집 밥 먹듯 드나든다. 돼지불고기는 비계가 붙은 국내산 전지에 직접 담근 조선간장과 과일 등을 써 양념을 한다. 이 고기를 석쇠 위에 올려 집게로 빠르게 헤집어 가면 구우며 '치익 치익' 소리와 함께 불길에 닿은 간장과 고기 내음이 솔솔 흘러나온다. 스테인리스 쟁반에 김치, 양파절임, 콩나물국, 상추가 한가득 나온 모습을 보면 먹기 전에도 이미 배가 부르다. 돼지불고기는 보통 접하는 것보다 조금 더 간간하지만 조선간장을 쓴 까닭인지 '짜다'라는 불평 대신 밥을 한 숟가락 더 먹게 하는 저력이 있다. 따로 시켜야 하는 공깃밥은 밥알에 윤기가 흘러 그 값이 아깝지 않다. 여기에 멸치육수에 간장처럼 집된장을 쓴 이 집 된장찌개를 주문해 훌훌 밥에 비벼 먹으면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소가 여물을 먹고 왜가리가 논두렁에 서 있는 시골 어딘가에 온 듯한 기분도 든다. 그리고 그 밥상을 물린 뒤에는 김을 매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돼지불백'은 힘을 쓰고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자를 위한 음식이니까. 돈과 시간을 아껴야 살 수 있는 고단한 어른을 위한 음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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