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586에 눌리고 2030에 치이고… '사추기(思秋期)' 앓는 X세대

조선일보
  • 김미리 기자
    입력 2019.03.23 03:00

    우리 사회 허리… 40대가 앓고있다

    우리 사회 허리 40대가 앓고 있다 일러스트
    일러스트= 안병현
    20년 차 직장인 정현정(43)씨는 점심 시간 부장의 '호소 아닌 호소' 때문에 곤혹스럽다. "정 차장, 약속 있어?" 옆자리 후배들은 이미 '혼밥' 채비를 마친 상태. "부장의 애절한 눈빛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어요. 50대 부장도, 20대 후배도 이해가 가요. 우리 세대가 상사에게 점심 사역하는 마지막 세대, 후배한텐 점심 사역 못 받는 첫 세대 아닐까요(웃음)."

    우리 사회 40대의 애환이 깊다. '497(40대, 90년대 학번, 1970년대생) 세대'인 이들은 20대엔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발칙해 'X세대'(더글러스 커플랜드의 1991년 소설 'X세대'에서 유래)라 불렸다. 개중엔 화려한 유흥으로 압구정·홍대 주름잡던 '오렌지족'도 있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난 세상의 중심'이라고 외쳤던 혈기는 세파에 부딪혀 포말처럼 사라졌다. '586(50대가 된 386)'과 2030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태어난 세대. 닐 하우·윌리엄 스트라우스의 1991년 저서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에서 처음 언급)'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처지다. 몸까지 쑤신다. 슬슬 건강 검진이 두려운 나이. 용종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다. 몸도 마음도 괴롭다. 중년의 사춘기, '사추기(思秋期)'를 앓는 40대가 많다.

    '요통' 앓는 한국 사회

    지난 1월 행정안전부에서 발표한 주민등록 인구 통계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연령은 42.1세(남 40.9세, 여 43.2세). 40대가 한국의 허리란 얘기다. 허리 근육이 단단해야 신체가 건강하듯 40대가 단단해야 사회도 건강하나, 한국 사회는 '요통'에 시달리고 있다. 속앓이하는 40대가 적잖다.

    우리 사회 허리 40대가 앓고 있다 일러스트
    낀 세대는 언제나 있었지만 X세대였던 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혼란은 이전과 결이 다르다. X세대는 한국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199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의 수혜로 해외여행을 시작했고, 개인 이동통신 수단의 원조격인 '삐삐'를 접한 세대. 그렇다고 '꿀 세대'만은 아니다.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취직난을 경험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고도 성장기를 기반으로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세대였고, 밀레니얼 세대는 성장이 멈춰 꿈이 없는 세대라 합니다. 40대는 '목표 중독'의 마지막 세대지만 꿈은 이룰 수 없는 세대예요." '토닥토닥 마흔이 마흔에게'를 펴낸 19년 차 직장인 김태윤(46)씨는 497세대를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유독 큰 세대"로 봤다. X세대가 "개인을 조직에서 분리한 첫 세대"라는 점을 주목한다. "머리로는 개인이 앞서는데 몸은 조직이 앞서는 사회에 담그고 있다"며 "몸과 머리가 따로 노니 내적 갈등이 심하다"고 했다.

    스타트업 대표 이주은(가명·43)씨는 "생애주기상 학부모가 되고 노년이 된 부모님을 보살펴야 하는 '중년'의 특성에,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접한 'X세대'의 특징이 더해져 '낀 세대' 성격이 강화된 것 같다"고 했다.

    작가 정여울(43)은 산문집 '마흔에 관하여'에서 양쪽으로 치이며 할 말 제대로 못 하는 40대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위 세대는 '너희들은 배고픔도 전쟁도 가난도 모른다'며 우리를 철없는 반항아로 바라보았고, 우리보다 아래 세대는 '선배들은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N포 세대 이런 말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잖아요'라고 항변하곤 한다."

    쿨 강박… 꼰대 자기 검열

    '쿨함'을 미덕으로 삼기 시작한 세대. '꼰대' 낙인은 치명상이다. 대기업 팀장 김태우(가명·46)씨는 회식 날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시간에 딱 맞춰 사무실을 나선다. "요즘 후배들이 '먼저들 가 있어'란 말을 싫어한대요. 안 그래도 가기 싫은 회식인데 더 늦어진다고." 김씨는 "임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문자 보내는데 나는 후배에게 카톡 보낼 때 시계부터 쳐다본다"고 하소연했다.

    '조직=나'로 여기는 선배들을 보며 반면교사 삼으려다 꼰대 강박증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직장인 안정식(46)씨는 "'이런 말 하면 꼰대인가' 쉴 새 없이 자기 검열하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 노동' 해야 하나 싶다"며 "남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 세대 특징 아닐까 싶다"고 했다.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 좌절이 더 크다. 직장인 유민정(43)씨는 "60대 시어머니들이 '쿨한 시어머니'가 되려 하지만 며느리 입장에선 어차피 시어머니인 것처럼 '쿨한 선배'인 척해도 결국은 '젊꼰(젊은 꼰대)'이라는 후배 얘기를 듣고 힘이 빠졌다"고 했다.

    2030 페미니즘 열풍을 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워킹맘 이은영(가명·46)씨는 "자기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30대 워킹맘을 보면서 '참는 우리가 바보였다' 싶다가도 '자기만 챙기는구나' 싶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결국 불이익 당하는 사례를 많이 봐와서 조언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말해 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 가만히 있는다"며 "이게 과연 좋은 선배일까, 이런 생각 하는 내가 꼰대인가 자문하게 된다"고 했다. 안지은(가명·46)씨는 "선배들은 왜 성희롱 같은 걸 참고만 있었느냐고 하는 여자 후배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며 "처음엔 화가 났지만 곱씹어 보니 불합리한 상황들을 웃음으로 넘겼던 나 자신을 냉정하게 돌이켜 보게 됐다"고 했다.

    몸과 맘 간극 가장 큰 세대

    "맘은 'BTS'인데 몸은 '김건모'랄까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는데 몸은 세월에 직격탄을 맞았어요." "몇 년 전부터 새카매진 건강 검진 결과표에 마음이 무겁다"며 김철수(45)씨가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40대는 몸과 마음의 간극이 가장 큰 세대"라고 한다. 심신 불균형이 '사추기' 증상을 더 부추긴다. 신현영 한양대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40대가 상대적으로 더 젊게 느껴지는 착시 효과가 있다"고 했다.

    흡연, 음주, 운동 부족 등 잘못된 생활 습관이 누적돼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때. 만성질환도 슬슬 나타나고 돌연사도 급증한다. 올 초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2017년 돌연사 사망자(심장 문제로 인한 급성 심장 정지로 사망한 사람) 분석 결과를 보면 40대 돌연사 사망자(1097명)가 30대(365명)의 세 배 수준이었다. 신 교수는 "40대는 지금까지의 관리 여부에 따라 건강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나이인 동시에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노년 건강이 좌우되는 중요한 연령대"라고 했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야 할 시기라는 말이다.

    세대 이어주는 연결 고리

    낀 세대가 고달프기만 한 건 아니다. 성취하고 느낌표 찍는 위 세대에 익숙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인생에 물음표 던지는 아래 세대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기업 운영 5년 차인 엄윤미(43) C프로그램 대표는 "우리 세대는 성장기 막차를 타고 조직에 진입했지만 2030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인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한 이들이 많다"며 "이제 막 나름의 책임과 권한을 갖기 시작한 우리 또래가 30대 후배들이 멋지게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두 세대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태윤씨는 "40대는 데모가 일상이었던 '쎈캐(센 캐릭터)' 586과 새로운 캐릭터 밀레니얼에 가려 있는 '저평가 우량주'일지도 모른다"며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경험한 세대 특성을 발휘하면 의사 결정의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497세대는 고도성장기, 산업화, 민주화, 4차 산업혁명기를 고루 경험한 독특한 세대이기 때문에 2030과 5060을 잇는 가교 역할에 안성맞춤"이라며 "다만 민주화의 아이콘에서 기득권의 상징이 된 '386'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일찍 동력을 잃고 조로(早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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