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처음 다닌 초등학교 교가는 "무량산 지켜주는 포근한 터~"로 시작한다. 가끔 그 앞을 지나갈 때면, 50년 전 운동장 조회 때마다 1000명 넘던 전교생이 쩌렁쩌렁 교가를 부르던 장면을 회상한다(지금은 50명이 채 안 된다). 전학 간 초등학교 교가는 "하늘에 솟은 모악 장엄도 하고/ 다가천 흐르는 물소리도 맑다/ 이 강산 정기 받은 우리 건아들~"로 이어진다.
풍수의 구성 요소는 산과 물, 두 가지다.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늘려주기에 중요하다. 전통 취락 입지가 배산임수(背山臨水)인 이유이다.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는 "백두와 금강"으로 시작한다. 백두산과 금강의 정기를 받아 나라의 동량이 되라는 가사다. 전국 대부분 교가에는 인근의 명산대천이 언급된다. 명산대천 정기 받아 훌륭한 인물 되라는 '복음(福音)'이다.
최근 전교조가 친일 작가가 쓴 교가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 한 논설위원이 "교가가 무슨 죄냐"며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조선일보 2019년 2월 27일 '만물상'). 필자는 전교조는 아니나 교수들의 '전교조'에 해당되는 '교수노조' 창립 멤버다. 그렇지만 전교조가 교가에 시비를 거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은 교가에는 그 학교가 들어선 땅의 풍수[山水]가 좋아 학생들 역시 훌륭하게 될 것이라는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이 깔려 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대지관이다. 교가를 통해 그 지역 산천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일부 교가가 친일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제강점기가 아닌 해방 이후의 일이다. "백두와 금강"으로 시작한 교가도 서정주 시인이 그곳 국어 선생으로 재직할 때 지었다.
더 본질적 문제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다. 문학전문가(평론가·교수)들도 이 부분을 무시한다. 흔한 실수는 작가의 생애를 바탕으로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다. 반(反)독재투쟁 작가가 쓴 작품은 무조건 반독재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하려는 오류이다. 독일 유학 초기 필자가 애를 먹은 부분이다. 작품 그 자체를 읽으려 하지 않고, 작가의 생애를 근거로 작품을 해석하려 하였다. 당시 독일 지도교수의 지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분리하여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의 의도와 작가가 활용한 언어의 의도는 다를 수 있다. 또 작가의 의도와 구현된 작품이 말하는 의도 사이에는 거대한 회색지대가 존재할 수 있다. 작품에 사용된 언어는 작가만의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더러 작가보다 더 교활하다(Texte sind mitunter schlauer als ihre Autoren). 우선 그 작품 속에 나열된 언어들의 연결을 추적해 작가의 의도와 달리 작품이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라."
며칠 전 동문수학했던 독일인 독문학자 친구와 이 문제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논리라면 괴테·실러·레싱의 작품도 더 이상 읽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작품은 철저하게 가부장적 관점에서 여성을 무시 혹은 억압하는 관점에서 쓰였다. 지금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하나! 몰락한 동독의 국가 가사("폐허에서 부활하여/ 미래로 나아가니~"로 시작)는 서독의 국가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나 지금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패자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승자의 논리를 강요하는 잘못이다."
작가·작품·독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친일파 작가에 의해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교가를 단죄되는 것은 잘못이다. "국가의 불행이 시인에게 행운이 될 수 있듯(國家不幸詩家幸)", 시인의 불행이 시의 행복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