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보른홀머 거리의 '뵈제' 다리는 행인으로 북적였다. 이곳은 분단의 상징인 '국경 검문소'가 있던 장소다. 앞으로 10년, 늦어도 100년 후면 한국은 통일 국가가 돼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분단국가가 합쳐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러 나는 지난달 통일 '선배'인 독일로 향했다. 동독과 서독이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합쳐진 1989년은 딱 30년 전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

[계급-3등급으로 나뉜 국민] 서독 출신 38세 발레리 팔처

"동독 출신은 3등 국민 취급, 30년 지났지만 차별장벽 여전"

"저는 통일이 된 날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때 나이(8세)도 어렸고요. 하지만 동독 출신 제 친구들은 달라요. 저처럼 어린 나이였는데도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지던 날을 또렷하게 떠올립니다. 당시 동독인에게 (베를린)장벽 붕괴는 자유와 희망을 뜻했지만 서독인들은 흥분보다 불안을 더 느꼈습니다. 부도난 친척집 하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통일 후 초등학생으로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동독 학교로 전학 갔다가 다시 서독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동독이었던 지역에서 다닐 땐 '난 서독에서 온 아이다'는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같이 놀 때 '난 너완 달라'라는 태도로 친구들을 대했어요(지금은 왜 그랬을까 좀 쑥스럽지만). 다시 서독에 오니 이번엔 '오씨(Ossi·동독 출신)'라고 서독 아이들이 놀려대더군요. 서독 어른들은 동(東)베를린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거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결과는 달랐지만. 요즘도 이런 갈등과 경계심은 찌꺼기처럼 남아 있습니다. 독일엔 이런 말이 있어요. 서독 출신 기득권층이 1등, 서독 일반인이 2등, 동독 출신은 3등 클래스(계급)라고."

동·서독 출신들과 손잡고 -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시작된 독일 베를린 보른홀머 거리에서 황성진(가운데) 탐험대원이 동독 출신 레지나 슈미트(60·왼쪽)씨와 서독 출신 발레리 팔처(38)씨의 손을 잡고 뛰고 있다.

[등기부등본-심각한 부동산 갈등] 동독 출신 60세 레지나 슈미트

"통일은 낭만 아닌 현실… 서독 사람이 갑자기 자기 땅이라며 소송"

"난 동베를린에서 작은 잡화점을 했습니다(옛 동독에선 어느 정도 상업 활동이 허락됐다). 난 통일을 굉장히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나라 밖을 여행하는 그 자유가 부러웠지요. 통일 소식을 들었을 때(통일은 정말 급작스럽게 이뤄졌는데요!) 나는 장벽이 붕괴한 현장으로 뛰어갔습니다. 한 시간에 몇 걸음 못 옮길 정도로 미친 듯이 거리로 사람이 쏟아졌습니다. 감격 속에 며칠을 보냈는데, 곧바로 현실이 닥치더군요. 처음엔 좋았습니다. 많은 서독인이 동독 물가가 싸서 좋다면서 우리 가게에 물건을 사러 왔거든요. 그런데 얼마 뒤 모르는 서독 사람이 내 가게가 자신의 소유라며 소송을 걸어오지 뭡니까. 분단 전 등기부등본이 있다면서! 수십년 살아오던 곳을 내놓으라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동독인이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렸고 서독 사람이 소송을 걸어올까 두려워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3년 가까이 소송이 이어진 후 서독인의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후일 신문에서 읽으니 이런 소송이 100만건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성경 다음 등기부등본'이란 말이 돌 정도였죠. 몇 년 후 결국 나는 가게를 팔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겠다는 약삭빠른 서독인이 와서 가게를 매입했지요. 결국 대부분 소송은 흐지부지됐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정부가 보상금을 주는 형식으로 난리를 무마했습니다. 그 돈 받은 서독인들이 내 가게 같은 동독 부동산을 사들인 셈이죠. 깔끔하다고? 서독 사람들이 나랏돈 왕창 들어간다고 불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낙오자-경제 불균형의 그늘] 서독 출신 변호사 60세 샤이드만

"당시 동독 3040 대량 실직, 그 자녀들이 극우로 빠지더라"

샤이드만

"동독인들은 서독의 자유를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통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앞서나간 서독과 합쳐지면 동독이 일순간 빈민가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했지요. 1990년 헬무트 콜 총리가 동·서독 화폐가 1대1로 교환되게 할 것이라 약속한 후 두려움은 기대로 변했습니다(통일 전 암시장에서 동·서독 화폐는 8대1 비율로 거래됐다). '어쩌면 우리도 서독 사람처럼 잘살려나 보다'는 희망이 넘쳤지요. 이런 기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생겨났지요. 최고의 승자는 당시로서는 '어르신'이었던 50대 이상이었습니다. 돈 안 내고, 경력 다 인정받으며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또 동·서독 할 것 없이 20대는 살 만했지요. 세상이 뒤집히면 젊은 친구들이 유리하게 마련이니까, 하하. 낙오자는 동독의 30·40대였습니다. 젊은이처럼 빠르게 적응할 능력은 없는데 기존 기업들이 해체·재편되면서 대량 해고를 당해야 했으니까요. 30·40대 실업자가 대거 쏟아졌습니다. 이들의 어린 자녀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는 후일 극우(極右)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실업수당 등으로 서독 쪽에서도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미래-힘들지만 하나돼야] 독일인들이 전한 통일 조언

"그래도 통일… 분단 상태로는 유럽의 강자 될수 없었겠죠"

"통일 후 30년, 서독 출신 발레리와 동독 출신 레지나는 요즘 베를린에서 '통일 관광'이란 에어비앤비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독일인에게 분단의 기억이란 이제 명물 관광 상품이 되어 흔적만 남은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한반도 통일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보고 있는 스물네 살 대학생입니다. 탈북 학생 멘토링을 하면서 통일 후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베를린의 최대 검문소였던 보른홀머 검문소는 요즘 소셜네트워킹용(用) 사진을 찍는 이들로 북적대는 모습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조각들은 베를린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다양한 예술가들이 개성 있게 이들을 칠해두었기에 이를 마주치는 일은 휴대폰 게임 '포켓몬고' 요괴들을 만나는 것만큼 흥미진진했습니다. 독일은 통일에 큰 비용을 썼지만(약 1600조원 추산) 그 위기를 극복하고 유럽 최강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래도 역시 통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솟았던 동독의 실업률도 동독에 공장이 많이 세워지며 2000년대 중반엔 3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합니다. 이번에 독일인들은 제게 통일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재산권을 소송으로 처리하면 너무 복잡하다. 돈이 들어도 보상이 낫다' '북한에 주기만 해서는 안 되며, (북한) 어르신들의 남한 관광부터 시작하면 어떤가' 등등. 그중에 저는 어떤 어려움도 전쟁만큼은 아니라며 웃던 레지나의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통일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지. 그래도 통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