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억 들여 김일성 별장 복원 추진… 뭇매 맞는 포천시

입력 2019.03.22 03:01

산정호수 둘레길에 설치 계획… 별장 있었다는 근거도 없는데 김일성 유물까지 들여놓기로
"제정신이냐" 항의·집회 줄잇자 市 "강행 않겠다" 한발 물러서

경기도 포천시 명성산은 중턱에 있는 산정호수로 유명하다.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감싸안은 커다란 호수를 보러 사람이 많이 찾는다. 최근 이 고요한 호수가 '김일성 별장' 때문에 시끄러워졌다. 포천시에서 54억원을 들여 호수 일대에 김일성 별장을 복원하고 김일성 유물을 사들일 계획을 세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이 크게 반발한 것이다.

지난 12일 오후 찾아간 산정호수 입구에는 팻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포천시에서 수년 전 설치한 '김일성 별장' 표지판이다. 안내문에는 '김일성 별장이 위치했던 이곳은 동족상잔 이전에는 북한의 소유지였다'며 '산정호수와 명성산의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산정호수의 모양이 우리나라의 지도를 뒤집어놓은 모양이라 김일성이 작전 구상을 위해 별장을 지어놓고 머물렀다 한다'고 적혀 있다. 인근을 지나던 관광객 김태열(21)씨는 "김일성 별장이 여기에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며 "저 말이 사실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경기 포천시 산정호수 둘레길에 ‘김일성의 별장’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 포천시 산정호수 둘레길에 ‘김일성의 별장’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철오 기자

산정호수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사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포천시 관계자는 "시 내부에도 관련 사실을 입증할 고증 자료가 전혀 없다"며 "지역에서 소문으로 전해 내려온 설"이라고 밝혔다. 주민들 사이에 도는 소문도 제각각이다. '일제가 호수 관리를 위해 만든 사무실을 김일성 별장으로 썼다'고도 하고 '김일성이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다 주변 자연환경에 감탄해 '별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한 게 전부'란 소문도 있다. '별장이 아니라 어쩌다 하룻밤 잤을 뿐인데 말이 와전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도 시에서는 예상 사업비 54억원을 책정하고 산정호수 주변에 부지를 매입해 '김일성 별장'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 관련 유물도 찾아내 사들이려 했다.

계획이 알려지자 주민 항의가 잇따랐다. 지난주까지도 시청으로 매일 수십 통씩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시 담당자는 "시민들이 전화해 '이게 말이 되느냐'며 항의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도 반대 글이 올라왔다. '세금 54억원으로 김일성 별장이라니' '포천시 김일성 별장 복원 반대' 등의 글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김일성은 한민족 수백만을 전쟁으로 죽게 만든 전범 수괴' '복구할 가치가 있느냐. 쓸데없는 짓 안 했으면 한다' '김일성을 찬양하나. 미쳤다' 등의 반응이 잇따랐다. 지난 17일에는 명성산 중턱에서 시민단체 회원 5명이 '호국영령 통곡한다' 등의 팻말을 들고 항의 집회를 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포천시는 "김일성 별장 복원을 강행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시는 "주민이 먼저 제안해 시작하게 된 사업"이라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2000년대 들어 산정호수 일대에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주민들이 "김일성이라도 연결해 관광객을 모아보자"고 나섰다는 것이다. 십수년 전 산정호수에서 식당을 운영했다는 권봉순(74)씨는 "1990년대만 해도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며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관광객이 10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양대종 산정리청년회장은 "포천은 군부대가 밀집한 군사 도시로 북에 대한 적대심이 많은 지역"이라며 "김일성 별장은 관광객 유치 수단으로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 오간 얘기"라고 말했다.

김일성을 관광 콘텐츠로 연결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김일성의 별장을 되살리겠다는 발상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시대착오적이며 무리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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