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가 18일(현지 시각) 한·미 양국 군의 전쟁 지휘 극비 벙커인 경기 성남의 '탱고' 지휘소와 군산 공군기지와 관련한 예산을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용 예산에 쓸 수 있도록 전용(轉用)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국경 장벽 건설 사업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데 민주당 등의 반대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탱고 지휘소 예산 전용 여부는 아직 미정이지만, 장벽 건설을 위해 주한미군 관련 예산을 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최근 을지프리덤가디언(UFG) 등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줄줄이 폐지·축소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예산까지 전용될 경우 한·미 동맹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CNN은 이날 미 국방부가 의회에 국경 장벽 건설 예산으로 전용하기 위한 국방 분야 사업 목록을 보냈다며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국과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백 개 국방 분야 사업이 대상에 포함됐다. 지난해 이 사업들에 배정된 예산은 43억달러(약 4조8600억원), 올해 책정된 예산은 68억달러(약 7조6900억원)에 달한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에 제출된 목록에는 작년 말 기준으로 아직 예산이 지원되지 않은 국방 건설 사업이 모두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선 한·미 연합사령부의 핵심 시설인 성남의 탱고 지휘통제시설 사업과 군산 공군기지의 드론(무인기) 격납고 사업이 전용 대상에 들어갔다. 성남 탱고 지휘통제시설에는 올해 1750만달러, 군산 드론 격납고 사업에는 지난해 5300만달러의 예산이 배정됐다. 주일 미군의 경우 가데나 공군기지의 1000만달러짜리 사업 하나만 들어갔고, 독일에선 5개 주둔 기지의 사업이 재검토 대상에 올랐다.
성남 탱고 지휘소는 한·미 연합사령부의 전시(戰時) 지휘통제소로, 유사시 한·미 양국 군의 두뇌이자 심장부라 할 수 있다. 탱고(TANGO)는 'Theater Air Naval Ground Operations'의 약어로 '전구(戰區) 육·해·공 작전 지휘소'라는 의미다. 1970년대 성남의 한 산속 화강암 터널 내에 극비 시설로 만들어졌다. 지난 2005년 3월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방문해 외부에 알려졌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긴장이 고조됐던 2017년 8월 NBC 종군기자 리처드 엥겔 수석특파원에게도 극히 이례적으로 공개됐었다.
탱고는 적의 핵무기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돼 있다. 생화학무기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으며, 외부 지원 없이 약 2개월간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로처럼 이어진 내부에는 회의실, 식당, 의무실, 상하수도 시설 등이 갖춰져 있다. 한·미 양국 군은 용산기지(주한미군사 등)의 평택 이전에도 불구하고 전작권(전시 작전통제권)의 한국군 전환 때까지 탱고를 계속 유지하고 시설을 개선할 계획이었다. 한미연합사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장성은 "탱고 지휘통제 시설 개선 예산이 전용될 경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상황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군산 공군기지는 주한 미 7공군 예하 8전투비행단 소속 F-16 전투기 2개 대대(35·80 비행대대), 미 공군 순환배치 비행 대대(1개 대대), 한국군 38비행전대 1개 대대 등이 배치돼 있다. 항상 30~40대 이상의 F-16 전투기가 운용되고 있다. 오산기지와 함께 대표적인 주한 미 공군기지이자 한·미 양국 공군 전투기가 함께 배치된 유일한 기지다.
예산 전용 가능성이 거론되는 대상은 군산기지 내 MQ-1C '그레이 이글' 무인공격기 격납고 공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레이 이글은 최대 30시간 동안 적진을 정찰할 수 있다.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 '바이퍼 스트라이크' 정밀유도폭탄으로 적 전차 등을 파괴하거나 요인 암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미군은 1개 중대(12대)의 그레이 이글을 지난해 2월부터 배치 중이고 다음 달 완전 작전 운용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격납고 공사가 지연될 경우 본격 작전 운용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한·미 연합 훈련에 대해 비용 문제로 부정적 인식을 보였고, 결국 주요 연합 훈련이 줄줄이 폐지·축소됐다. 연합 훈련에 이어 주한 미군 핵심 시설 예산까지 줄어들 경우 주한 미군 전력 약화는 물론이고 한·미 동맹도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가 최종 승인한 올해 예산안에 자신이 요구한 국경 장벽 예산 57억달러에 턱없이 못 미치는 약 14억달러만 배정하자 지난달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행정부는 의회 동의 없이도 예산을 전용해 장벽 건설에 쓸 수 있다. 국방부는 필요할 경우 내년도 예산에서 36억달러(약 4조800억원)를 전용해 장벽 건설에 쓸 계획이다. 국방부가 제출한 전용 가능 목록의 2019년 예산 배정액이 68억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이 중 36억달러를 전용할 경우 이 사업들에 상당한 차질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목록은 아직 검토 대상이기 때문에 예산 전용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의회는 앞으로 이 목록을 검토해 비상사태 선포로 영향을 받지 않을 사업들을 찾아내게 된다. 잭 리드 상원 군사위 민주당 간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안보 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그의 장벽 건설에 쓰려 한다"며 "그 결과, 일부 프로젝트는 탈선하거나 가로막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