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관제 민족주의'

조선일보
  • 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2019.03.18 03:17

    2008년 4월 베이징올림픽 성화가 서울 올림픽공원을 돌고 있었다. 봉송 행사에는 이를 지지하는 중국 유학생 수천 명이 나왔고, 티베트 인권단체와 충돌이 빚어졌다. 금속 조각과 돌멩이가 난무하는 폭력 사태가 뒤따랐다. 티베트 평화연대 측은 "(유학생들이) 50명을 한 조로 구성, 모두 90개 조를 짜 시위 참석 인원이 4500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또 "많은 양의 대형 중국 국기가 동원된 것 역시 조직적 개입 없이는 설명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날 유학생 시위는 중국식 '관제 민족주의'였다는 비판이 뒤에 나왔다. 1940년대 마오쩌둥이 공산주의를 뿌리내리면서 동력(動力)을 얻으려고 하강 침투식 민족주의를 만들었는데, 그 낡은 흔적을 서울에서 봤다는 것이다. 책 '상상된 공동체'를 쓴 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19세기 제정 러시아에서 관제 민족주의의 출발을 찾는다. 왕권이 약해질 때 권력의 정당성을 얻으려고 왕이 민족을 내세우는 관제 민족주의가 싹텄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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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1세 때 러시아 교육대신은 국가 3대 원칙을 러시아정교·전제주의·민족주의라고 규정했다. 앞에 두 원칙은 '정신적 예속'과 차르의 '절대 불가침성'을 강조했다. 그때 민족주의란 '국민을 단일체로 묶는 정치적 유대'를 상상한 것이라고 보는데, 차르가 앞장서면서 '관제 민족주의'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관료와 어용학자도 일을 거들었다.

    ▶'관제 민족주의'란 말을 엊그제 다시 들었다. '진보 학자'로 평가받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 세미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3·1절 기념사를 "관제 민족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단언했다. 외교부와 한국국제정치학회가 마련한 행사였는데, 최 교수는 현 정부의 일제 청산 움직임을 "관제 캠페인"이라면서 "지극히 갈등적인 문화 투쟁"이라고 했다. "문 정부는 '관제 민족주의'를 여러 이벤트를 통해 의식화하고 있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이 서너 차례 '빨갱이'란 말을 했던 것에도 최 교수는 "현 정부가 이념적 지형을 자극해서 촛불 시위 이전 못지않게 더 심한 이념 대립을 불러오고 있다. (…) 앞으로 100년간 정치가 발전할 거 같지 않단 생각도 든다"고 했다. 곁에 있던 문정인 외교안보 특보는 "(문 대통령의) 빨갱이 논쟁은 이념 전쟁을 넘어서자는 뜻인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 교수의 현실 진단이 정곡을 찔렀다는 반응이 많다. 정권이 자신감을 잃을 때 '관제 민족주의'로 급히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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