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삼성이 '丙'이 된 사연

입력 2019.03.14 03:13

성호철 산업2부 차장
성호철 산업2부 차장

지난 12일 국회에서 삼성전자와 한국전력공사, 안성시 원곡면대책위원회 3자(者)가 상생 협력 협약을 맺었다. 협약서 첫 문장에는 '갑(甲)' '을(乙)' '병(丙)'이 기재됐다. 갑은 원곡면대책위, 을은 한전, 병은 삼성전자였다. 갑은 그간 제기한 민원을 종결하고, 을은 송전선로 건설을 맡는다. 이후 세부 협약은 갑을이 별도 체결하기로 했다. 병은 한 번 언급되는데 '이번 협약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모두 댄다'는 것이다.

본래 갑을병은 계약서상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관행에선 계약의 주도권을 쥔 자가 갑이고 그 반대가 을이다. 병은 당사자라기보다 일의 처리에 필요해 끼워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과 저녁 자리에서 "계약서에 '병'으로 등장하는 삼성전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더니 "대기업 집단으로 불리는 우리는 모두 병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삼성이 병이 된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통상 돈을 내는 쪽이 갑이지만 을이 갑의 치명적 약점을 움켜쥐면 역전된다는 것이다.

"지방 도시에 주차장 건물은 착공했는데 주변 허름한 8가구가 '주차장은 혐오 시설'이라며 트럭의 공사장 진입을 막았어요. 공사를 방해하는 불법행위죠. 경찰서에 얘기해도 소용없고 매일 공사비만 올라가요. 결국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삼성은 2014년 10월 수십조원을 투자해 평택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정부와 협의해 필요한 전기는 안성시의 서안성변전소에서 끌어오기로 했다. 신규 라인은 불과 4년 뒤인 2023년 가동에 들어간다. 그런데 안성시~평택시 송전 선로가 지나가는 원곡면 주민 57가구가 건강과 환경오염을 이유로 민원을 제기했다. 정부는 뒷짐 지고 물러섰고 4년 6개월이 흘렀다. 이런 급박함이 삼성의 치명적 약점이었고 급행료(急行料)를 내서라도 갈등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

갈등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돈으로 푼 삼성의 해결 방식엔 찬성할 수 없다. 앞으로 유사한 갈등 때마다 이해당사자는 삼성식 해결을 바랄 테지만 모든 기업이 삼성처럼 돈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국내에 수십조원을 투자하려는 기업 활동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현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다들 중국·베트남 등지로 공장 이전하는 마당에 반도체만은 한국에 주력 공장 증설을 고집하는 업종이다. 반도체가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것도 이런 고집 덕분이다. 삼성전자는 외국인 주주가 56%의 지분을 차지하는 회사다. 이들은 '불합리한 지출을 하면서까지 한국 공장을 증설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급행료를 줘야 신설 공장에 제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누가 국내 기업의 공장 해외 이전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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