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스토킹 취급받는 '문재인 평화 프로세스'

조선일보
  • 김창균 논설주간
    입력 2019.03.14 03:17

    금강산·개성공단 재개 제안에 미 실무자, "No" 단답형 거부… "말귀 모르나" 전문가 비판까지
    워싱턴 공감대는 "제재 조여야" 거기 대고 남북 경협 외쳐봐야 실속 없이 국격과 국익만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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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균 논설주간

    북한 선전 매체가 작년 7월 "남조선 당국도 종전선언 문제를 수수방관하지 말라"는 논평을 내자 강경화 외교장관은 며칠 후 "종전선언은 우리의 외교적 과제"라고 화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취소하면 그만"이라는 상식 밖의 말까지 하면서 종전선언을 미국에 종용했다. 김정은이 10월 초 방북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게 "종전선언은 중요하지 않다"며 제재 완화 쪽으로 몸을 틀자 문 대통령은 유럽 순방길에서 만난 정상들에게 일일이 "제재 완화로 비핵화를 촉진하자"고 했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전면 재개 입장을 밝힌 이후로는 문 대통령과 참모들의 화두도 그리로 옮아 갔다.

    북한이 원하는 것마다 해주자는 한국 정부에 시달린 미국 측은 그 피로감을 언론을 통해 표출하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블룸버그통신의 작년 9월 보도가 대표적이다. 국제무대에 직접 등장 못하는 김정은이 하고 싶은 말을 문 대통령이 대신해주고 다닌다는 것이다. 야당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반년 만에 이 보도를 인용하자 청와대와 집권당은 "국가원수를 모독한 막말"이라고 펄펄 뛰고 있지만 국제사회가 이런 시각으로 한반도 정세를 관찰하고 있다는 건 뉴스거리도 못 된다.

    한국 정부가 북한과 한 몸으로 인식되면 미국이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을 통해 현실로 확인됐다. 한·미 동맹의 공조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미국이 배드 딜(나쁜 합의) 대신 노 딜(합의 없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당연히 한국에 귀띔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북 경협 재개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상 전문가를 대미(對美) 관계를 담당할 안보실 차장에 임명하는 인사를, 그것도 미·북 정상회담 당일 아침에 청와대가 발표하거나, 회담이 결렬되기 30분 전 청와대 대변인이 "이번 회담을 계기로 잠시 휴지기였던 남북 대화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브리핑하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회담 하루 전 "빅 딜, 스몰 딜 같은 용어는 미·북 협상 당사자들은 쓰지도 않는다"며 한국 언론에 핀잔을 줬는데 회담장에 들어갔던 볼턴 국가안보 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빅 딜'이라고 부르는 완전한 비핵화 제안서를 김정은에게 건넸다"고 밝혔다.

    한·미 간 엇박자는 회담 이후 더욱 증폭되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은 회담 다음 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문제를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했는데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관련 제재를 완화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 설명도 곁들이지 않고 "No"라고 했다. 상대방의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스토커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짧고 냉정하게 "No" 한 마디만 하라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예의를 차린답시고 말을 섞다 보면 스토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달라붙는다는 것이다. 국무부 관계자도 "현재로선 검토 대상이 아니다"라든지 "한·미 간 긴밀하게 협의해 나가겠다"고 여지를 남겼다가는 한국 정부의 집요한 요구가 이어질 거라고 봤을 것이다. 그래서 단답형 거부로 "가능성이 전혀 없다. 백번 천번 물어봐도 마찬가지니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 제안에 대해 미 전문가는 "음치(tone deaf) 같은 소리"라고 했다. 음치는 다른 사람들이 내는 음을 듣는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 엉뚱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워싱턴에서는 '김정은의 약점은 제재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북핵을 포기하게 하려면 제재를 확실히 조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는데 문 대통령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면박을 준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진도를 내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간다. 소득 주도 성장, 탈(脫)원전, 4대강 보 철거 같은 다른 정책들이 온통 뒤탈을 내는 상황에서 대북 정책 성과 하나로 내년 총선을 치러야 하는 처지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초조함 때문에 상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자꾸 들이대는 것은 역효과만 낼 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요청이 상대국 실무자에 의해 스토킹 취급을 받게 되면 국격과 국익, 그리고 5100만 국민의 체면도 함께 상처받게 된다는 점을 제발 헤아려 주십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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