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쌓여가는 '블랙리스트' 증거, 검찰 수사는 제자리

조선일보
입력 2019.03.14 03:18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임기철 전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2017년 11월부터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사퇴를 종용했고 거부하자 감사가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당시 과기혁신본부장은 "나는 지시를 전달할 뿐이니 (사퇴 종용이) 어디서 내려온 얘기인지 묻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과기정통부 차관도 "촛불 정권이 들어섰는데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계속 거부하자 지난해 1~3월 KISTEP에 대한 감사가 진행됐고, 임 전 원장은 임기를 2년 남기고 결국 사퇴했다. 전형적 블랙리스트 사람 찍어내기다.

이미 환경부가 전 정권 때 임명된 산하기관 임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무기한 표적 감사하고 쫓아낸 사실이 검찰 수사로 밝혀졌다. 임 전 원장 증언 내용과 판에 박은 듯 똑같다. 환경부 사건에선 청와대가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증거도 나왔다고 한다. 과기정통부에 지시하고 감사를 시킨 것도 청와대일 것이다. 이 정부 들어 중도 사퇴한 과학계 기관장이 10명도 넘는다. 원자력연구원장은 "직원들이 감사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 괴롭다"며 사퇴했고,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도 "대학에 피해 주기 싫다"며 물러났다. 7년 전 문제없는 것으로 결론 난 사안을 끄집어내 카이스트 총장을 사퇴시키려고도 했다. 모두 청와대 블랙리스트와 관련 있을 것이다.

통일부 산하기관 이사장에게 청와대·통일부가 사퇴 압박을 넣었다는 증언이 있다. 국무총리실, 기재부, 교육부, 법무부, 산자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임기 두 달 남은 윤봉길 의사 손녀에게 보훈처가 'BH(청와대)의 뜻'이라며 독립기념관장직에서 물러나라고 한 사실도 드러났다. 일부가 사퇴를 거부하자 정부 감사가 이뤄졌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체크리스트"라고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지난달 말 법무장관이 검찰에 '피의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검찰은 지난 2년 가까이 적폐 수사 때 거의 매일 피의 사실을 공표했는데 법무장관이 갑자기 이런 지시를 한 것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내용을 알리지 말라는 뜻일 가능성이 있다. 요즘 검찰 수사는 청와대 앞에서 머뭇거린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결국 꼬리 자르기 수사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이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피해'를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진실을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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