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경락도, 내장까지 발가벗겨 욕망 비춘다"

조선일보
  • 정상혁 기자
    입력 2019.03.13 03:00

    제31회 이중섭미술賞, 40년째 '인간의 몸' 그려온 정복수

    '몸'과 '圖'(그림 도)가 닮은 데에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류는 싫었다. 서양미술의 바깥도 싫었다. 그럼 뭘 그려야 하나? 속마음 자체를 보여줄 순 없을까? 옷이나 머리카락이나 피부 같은 것 없이, 연출 없이 인간 자체를 그릴 수 없을까?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온 인간, 과거와 미래가 총체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올해 제31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화가 정복수(62)씨가 말했다.

    정복수 화가가 작업실에 있는 미완성작 앞에 섰다.
    정복수 화가가 작업실에 있는 미완성작 앞에 섰다. "수상 소식을 듣고 '기대에 부합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되더라. 지금도 붓 잡기 무섭다.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안 되니까 자꾸 하는 것이다." /이태경 기자
    1976년 첫 전시부터 40년 넘게 인간의 몸에 매달려왔다. "내 그림은 일종의 경락도(經絡圖)"라는 정씨의 설명처럼 그림 속 인간은 터럭 하나 없이 내장까지 발가벗었다. 지난 7일 찾은 서울 남현동 작업실도 온통 사람 몸 그림뿐이었다. 다소 기괴할 정도로 투명하게 입 벌린 육체가 측면과 정면으로 욕망을 체화하고 있다. "인물화지만 이건 시대의 초상화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면서 느끼고 번뇌하는 결과물이다." 단 한 번도 모델을 두고 그린 적 없고, 그림이 사실적이지도 않다. 몸속엔 도상처럼 또 다른 몸, 눈과 입과 성기 등 여러 부위가 병렬되며 구상의 추상을 완성한다. 그림 '생각의 구조'〈아래 작은 사진〉의 경우 얼굴 안에 눈만 40개가 넘는다. "우리는 눈이 두 개뿐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온몸이 눈일지 모른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본다."

    광목·골판지·신문지 등 재료뿐 아니라 회화·판화·입체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전시 공간도 마찬가지여서 그림을 거는 대신 바닥에 펼친 이른바 '바닥화'로 유명하다. 1979년 첫 개인전은 '바닥畵―밟아주세요'였다. "6×10m 크기 공간을 사람 그림 하나로 채웠다. 천장화는 신, 벽화는 권력자, 바닥화는 평범한 사람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관람객이 그림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림 위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발로 비벼 끄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훼손의 동작이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2000년대부터는 그의 그림에 '가면'이 등장했다. 화폭에 실제 종이 가면을 붙인 뒤 채색하는 것이다. "벗겨도 벗겨도 껍데기가 나오지 않나. 인간은 희한한 동물이다."

    그의 욕망은 그림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새벽에 거리로 뛰쳐나가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을 정도다. "부산에 살다가 학교도 채 안 마치고 1976년 무작정 상경했다. 라면 박스에 붓이랑 팔레트만 대충 넣어왔다. 흑석동에 있던 친구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잠깐 누나 집에 간 사이 신세를 졌다. 거기서 혼자 그렸다." 지금껏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지녀본 적이 없다. "가끔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계속하다간 미쳐 죽을 것 같았다. 그림을 위해 다른 일을 하는 걸 못 견디겠더라. 차라리 거지로 사는 게 낫지." 그래서 "진짜 반(半) 거지처럼 살았다"고 했다. "아내가 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며 살림을 도맡았다. 돈 얘기로 한 번도 불평한 적 없는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다."

    그는 화랑가에서 그리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림이 너무 세고 장식성도 크지 않다. "그림에 값을 매기고 흥정하는 과정이 싫다. '어떻게 하니 팔리더라'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면 이상한 화가가 될 것 같다." 그래도 매일 그린다. "미완성작으로 처박아 두는 게 대부분"이지만, 지난해에 이어 오는 5월과 9월에도 개인전이 계획돼 있다. "누군가는 자기가 대학교수고 유명하니 나를 불쌍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림에만 시간을 쏟지 못하는 그들이 불쌍하다. 나는 인정받기 위해 그리지 않는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그릴 것이다."


    [이중섭미술상 심사평] "40년 뚝심… 몸의 궤적으로 파격적 미술 세계 구축"

    '생각의 구조'
    '생각의 구조'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이 올해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정복수 작가를 선정한 이유다. 청소년기에 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자기 세계를 고유의 스타일로 구축해 온 작가다. 작업의 의지, 독자적 감수성, 그 감수성을 증명하는 작품성으로 한국 형상 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점유했다.

    정복수는 인간의 신체·본능·욕망 등을 즉흥적인 몸의 궤적으로, 때로 양식화된 도상으로 거침없이 형상화했다. '형상성'은 대상의 재현이나 표현 범주를 넘어 세계에 대한 감성과 인식을 자유롭게 토로하며 주제화하는 미적 형식이자 성질이다. 그의 그림이 동시대적 모던함으로 보이는 건 살아 있는 인간을 생생한 동사형으로 그려내는 정직한 회화적 어법의 긴밀도 때문이다.

    정복수의 파격적 이미지는 그간 제도권에서 외면받아 왔다. 이름값이나 장식성을 원하는 미술 시장은 물론 설치나 미디어 작품이 중심이 된 대형 비엔날레에서도 좀처럼 호명되지 않았다. 이런 소외에도 정복수는 신념과 뚝심으로 40년 넘게 버텨왔다. 개성적 기량과 더불어 이런 집요한 작가적 태도가 이번 수상에 충분한 근거를 부여했다.

    올해 이중섭미술상의 심사 과정을 간단히 기술하자면 먼저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회에서 8명의 작가를 본심에 올렸다. 이후 별도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3명의 작가를 복수 추천으로 선정했다. 최종 투표에서 5명의 심사위원 중 4명이 기표한 정복수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심사위원마다 미학적 입장과 비평적 시각이 달랐지만 이 작가의 수상에는 이견이 없었다. 정복수 작가에게 축하를 보낸다.

    제31회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신항섭, 위원 김진하·박영택·진휘연·강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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