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독살 용의자 돌연 풀려났다

입력 2019.03.12 03:07

재판중이던 인도네시아 여성에 말레이 검찰, 이례적 기소 취하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독극물로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7)가 11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검찰의 기소 취소로 풀려났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이례적으로 취소 이유를 일절 밝히지 않았다. 외교 소식통은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속적으로 '아이샤는 북한 정보기관에 이용당한 무고한 희생자'라며 석방을 요구해왔다"면서 "말레이시아 정부가 그런 요구와 해당 사건으로 단교(斷交) 위기까지 갔던 대(對)북한 관계 회복 등을 고려해 이번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1일 현지 언론과 외신 등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법무장관은 지난 8일 아이샤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는 서한에 서명했으며 이에 따라 1심을 맡은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은 별도 선고 없이 이날 오전 아이샤를 석방했다. 아이샤는 변호사와 함께 재판정을 떠나면서 기자들을 향해 "오늘 아침에야 석방될 것이란 소식을 들었다. 매우 놀랍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이샤는 곧장 인도네시아로 귀국했다.

11일(현지 시각) 오전 김정남 독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가운데)가 말레이시아 검찰의 기소 취소로 풀려나고 있다. 아이샤는 법원을 나서면서 “오늘 아침에야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측은 아이샤의 석방 배경을 밝히지 않았다.
11일(현지 시각) 오전 김정남 독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가운데)가 말레이시아 검찰의 기소 취소로 풀려나고 있다. 아이샤는 법원을 나서면서 “오늘 아침에야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측은 아이샤의 석방 배경을 밝히지 않았다. /AFP 연합뉴스
아이샤는 베트남 국적 여성 도안 티 흐엉(31)과 함께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 청사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화학무기로 쓰이는 신경 작용제 VX를 묻혀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흐엉은 스프레이로 독극물을 뿌렸으며, 아이샤가 김정남 얼굴에 손수건을 덮었다. 김정남은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당시 아이샤와 흐엉에게 범행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했다.

아이샤와 흐엉은 이 북한인들을 TV 오락 프로그램 제작자로 알았으며, 몰래 카메라 촬영을 위해 장난을 치는 것으로만 알고 범행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말레이시아 검찰은 2017년 3월 두 사람을 고의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1심 재판을 맡은 샤알람 고등법원도 작년 8월 재판 때 검찰의 기소 내용을 '프라이머 페이시(prima facie·일단은 혐의가 입증된 것으로 간주함)'로 판단하면서 두 사람에게 자기 변론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이 많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재판 중 기소 취소라는 이례적 방식으로 석방이 이뤄진 것이다.

2년前 말레이시아 공항서 김정남 독살 - 2017년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오른쪽)이 스프레이로 김정남 얼굴에 독극물을 뿌리고,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왼쪽)가 손수건으로 덮는 독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그래픽.
2년前 말레이시아 공항서 김정남 독살 - 2017년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오른쪽)이 스프레이로 김정남 얼굴에 독극물을 뿌리고,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왼쪽)가 손수건으로 덮는 독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그래픽.

국내 형사소송법에도 1심 선고 전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검찰이 기소를 취하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뤄진 경우는 드물다. 2017년 9월 철도노조 파업과 관련해 위원장 등 주도자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검찰이 다른 노조원 95명에 대해 '무죄 선고가 예상된다'며 1심 선고 전에 기소를 취소한 적이 있다.

아이샤의 석방 배경과 관련해 이날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이샤 석방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간 고위급 접촉의 결과"라고 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에 이어 법무장관, 경찰청장을 잇따라 만나 아이샤 문제를 논의했다. 말레이시아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루스디 키라나 대사는 이날 "말레이시아 정부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결국 김정남 사건의 '사실' 검증보다는 '외교'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김정남 암살이 자신들 소행임을 전면 부인하는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말레이시아 정부 측에 아이샤 선처를 요구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고위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베트남 국민인 흐엉을 김정남 암살 사건에 연루시킨 것에 대해 베트남 정부에도 비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베트남은 당시 북측의 사과에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으나 남북 대화 국면에 이어 최근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 개최 등으로 북한과 관계를 개선했다.

한편 공범 흐엉에 대한 재판은 오는 14일 속개된다. 흐엉은 무죄를 주장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쇼크에 빠졌다. 내 머리가 하얘졌다"며 당혹스러워했다고도 한다. 흐엉의 변호사는 "흐엉이 이번 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며 "아이샤만 석방된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낙담하고 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해당 사건을 사실상 덮기로 방침을 정함에 따라 흐엉 역시 조만간 석방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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