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대통령은 '우리 대한민국'이라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입력 2019.03.06 03:17

3·1절 대통령 기념사서 '자유'는 2번, '우리나라'는 0번
생뚱맞은 빨갱이 논쟁과 남북통일 레토릭만 차고 넘쳐
'위대하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는가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말하는 사람이다. 3·1절 기념사에 다섯 번이나 나왔다고 해서 언론이 주목한 '빨갱이'라는 단어는 뜻으로나, 어감으로나, 혹은 음운학적으로나(발음이 예쁘지 않다) 대통령의 공식 기념사에 걸맞지 않은 단어였다. 무엇보다 이웃을 자극하고, 내부를 분열시키며, 소모적인 과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명한 단어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다양한 문장에 넣어 사용한 걸 보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분명 어떤 의지의 표명이다. 메시지의 귀재들이 몰려 있는 청와대에서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내가 오히려 주목한 건, 연설문 쓰는 데 아껴 쓴 표현들이다. 가장 눈에 띄지 않은 표현들이다. 또 눈을 감고 들어보았을 때 어떤 청자(聽者)를 상정하는 게 가장 어울릴까 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 문제를 갖고 3·1절 기념사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가장 찾기 어려운 표현은 '자유'였다. 긴 연설문을 통해 단 두 번 언급되는데, 그 중 하나는 비무장지대 계획을 밝히며 "그것은 우리 국민의 자유롭고 안전한 북한 여행으로 이어질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였다. 거기서 자유는 '자유 왕래'를 말하는 것이지 '자유 체제'는 아니었다. 당연히 '자유민주'라는 말도 찾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도 찾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언급하며 2번,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평양 시민들에게 약속했다'에 1번,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가 함께 대한민국을 일궈왔다'에 1번, 모두 4번이 전부다.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것 같은 '우리 사회' 같은 말은 있었으나, 과거 대통령들이 각종 기념사에서 즐겨 썼던 '우리 대한민국' '우리나라' 같은 표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문장에서 주어는 매우 중요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주어를 아껴 쓰다 보니 누구를 위한 연설문인지 때때로 혼란스러웠다. 자주 등장하는 '우리'라는 단어가 무차별적으로 다양한 문장에서 주어를 대리하고 있었는데, 그 '우리'가 대한민국인지, 남북인지, 한반도인지, 현 정부인지, 맥락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연설문은 "100년 전 오늘, 우리는 하나였습니다"로 시작한다. "100년 전에는 남과 북이 없었습니다"라고도 했다. 그런 배경을 깔고 연설문을 듣다 보면 "우리는 함께 독립을 열망"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남북한으로 들린다. 그러다가 "우리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할 때는 '문재인 정부'로 축소된 주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기념사의 스케일만 보면 마치 '신한반도체제'에서 새로 선출된 리더가 하는 연설 같다. 평안남도 맹산, 북간도 용정,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하와이, 필라델피아를 종횡무진 오가며 베이징대 교수를 기명으로 인용했다. 과거 광활했던 우리의 활동 무대와 미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남북한조차 화해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남북 분단도 통탄스러운데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 지역을 가르다니 이러고서 우리가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 선열들을 대할 면목이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기념사에서 "북한에 대해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 민족으로서 보듬어 가야 하고 끝내 우리가 책임져 가야 될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따듯하게 문을 열고 대화로써 풀어 나갑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 대한민국 국민은 헷갈림 없이 대한민국 대통령 연설문을 들었다.

작년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 3·1절 기념사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그게 올해 들어서는 "신한반도체제로 담대하게 전환해 통일을 준비하겠다"로 바뀌었다. 아직 대한민국에 살며 세금을 내고 국방을 걱정하는 나에게 '신한반도체제'란 누가 사는 어떤 나라인지 그림이 들어오지 않는다.

신기루 같은 남북통일의 레토릭은 차고 넘치는데, 대한민국 레토릭은 옹색하기만 하다. 100년간 지속될 '신한반도체제'만 만주 벌판처럼 펼쳐져 있다. 3·1절만큼 국민통합을 말하기 좋은 모멘텀이 없다. 그 좋은 기회를 생뚱맞은 빨갱이 논쟁과 갈 수도 없는 북한 땅에 내어주느라 대한민국은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그게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놀란 청와대가 기념사를 급히 수정하느라 한 실수라면 오히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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