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채 막을 내렸다. 세기의 핵담판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됐던 이번 회담의 결렬 배후에는 ‘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안보보좌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당초 볼턴 보좌관은 백악관이 발표한 이번 회담의 수행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볼턴은 지난해 1차 미·북 정상회담 전 리비아식 비핵화 등을 내세워 북한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를 의식한 듯 한동안 볼턴은 미·북 협상과 관련해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이번 회담의 수행원 명단에서 빠진 것도 북측을 배려한 조치라는 해석이 나왔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안보보좌관.

그러나 볼턴은 회담 전날인 26일 하노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교가에서는 28일 참모들이 참여하는 확대 정상회담에 볼턴이 들어가느냐, 스티븐 비건 대북 특별대표가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라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볼턴으로 결론나자 회담의 ‘빨간불’을 예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결국 하노이 회담은 아무런 결과 없는 ‘노딜’로 결렬됐다.

회담이 끝난 후 볼턴 보좌관은 다시 북한 비핵화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방안과 상응조치를 담은 ‘빅딜’을 북한 측에 계속 요구했다"고 밝히며 이번 회담이 ‘실패한 회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외교가는 볼턴이 북한 비핵화 문제에서 전면에 나선 것을 주시하고 있다. 그의 등장은 미국의 대북 강경 기조 강화를 의미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 변호사 출신 외교통…강경 매파 ‘네오콘’ 핵심 인사

볼턴은 1948년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예일대 인문학 학사를 취득하고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볼턴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실에서 인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74년부터는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볼턴은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인 1985년 법무부 법무담당 차관을 시작으로 워싱턴 정가에 본격 발을 들였다. 1988년에는 법무부 사회담당 차관을 지냈으며, 조지 HW 부시 정부가 들어선 1989년에는 국무부 국제기구담당 차관을 역임했다. 민주당 소속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한 기간에 그는 다시 변호사 생활을 이어갔다.

조시 W 부시(가운데) 전 미국 대통령이 2005년 8월 존 볼턴(왼쪽)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했다.

이후 아들 부시인 조시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자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을 지냈고,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했다.

특히 볼턴은 부시 정권 시절 강경 매파 외교정책을 주도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볼턴은 유엔 주재 대사 시절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경책을 펼쳤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지지했다.

같은해 그는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을 지옥에 비유하고 김정일을 ‘독재자’ ‘폭군’이라고 표현했다가 북핵 협상을 위한 6자회담 미국 대표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볼턴이 대표단에 포함되자 그를 ‘인간쓰레기’ ‘흡혈귀’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나 볼턴의 대북 강경 기조는 계속됐다. 그는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에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1718호 결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 트럼프 외교 고문에서 美 안보 사령탑까지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볼턴은 다시 공직을 떠났다. 그는 유력 로펌과 미국기업연구소(AEI) 등 보수 성향 싱크탱크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또 폭스뉴스 해설자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미 정계에 목소리를 냈다. 2012년 미 대선 때는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미트 롬니 캠프에서 외교 정책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성공으로 워싱턴 복귀는 불발됐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이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볼턴은 트럼프 대선 캠프의 외교 정책 고문으로 차출됐다. 볼턴은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왔던 ‘미국 우선주의’ 정신도 볼턴의 머리에서 시작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1년 후인 2018년 4월, 볼턴은 미국의 안보사령탑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에 기용됐다. 당시 미국과 북한은 첫 정상회담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대북 강경파로 분류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 이어 ‘초강경파’인 볼턴의 기용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압박 카드라는 분석도 나왔다. 당시 로이터는 볼턴의 지명을 두고 "‘슈퍼 매파(super-hawk)’가 백악관 국가안보 사령탑에 앉았다"고 평가했으며,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전쟁 내각’을 구성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북한 노동신문은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악수하는 모습을 6월 13일 보도했다.

예상대로였다. 볼턴은 보좌관 취임 직후부터 북한과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비핵화 협상은 리비아식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해 북한의 강한 반발을 샀다. 그는 과거부터 리비아식 모델을 주장해왔는데, 이는 ‘선(先) 비핵화·후(後) 보상’ 원칙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수용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배후에 둔 반정부 세력에 붕괴됐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볼턴은 1차 미·북 정상회담 개최에도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회담을 전격 취소한 배경에 그의 입김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6·12 싱가포르 회담 수행단에 포함돼 비핵화 협상에 참여했다. 당시 김정은과 볼턴의 악수 장면이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볼턴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의 비핵화 진전을 요구하며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1차 회담 후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전면에 나섰고 2차 회담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 하노이 깜짝 등장한 볼턴…2차 미·북 핵담판 ‘결렬’

볼턴은 하노이 회담 개최 직전까지도 조용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불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21일 "2차 미·북 정상회담이 다가오면서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트럼프 정부가 내부적으로 분열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강경 입장을 완화하려고 하자 볼턴은 최대 압박 전략 유지를 강력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하노이 회담의 트럼프 대통령 공식수행원 명단에서도 볼턴의 이름이 빠졌다. 이를 두고 그에 대한 북한의 반감을 고려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볼턴은 회담 전날 돌연 하노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7일 트위터를 통해 "앞으로 이틀 동안 논의할 것이 많다"고 했다. 볼턴의 깜짝 등장은 만만찮은 협상의 신호로 풀이되기도 했다.

2019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 확대정상회의. 이날 미측에선 존 볼턴 NSC 보좌관, 폼페이오 장관,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이 배석했다. 북측에선 김영철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이 자리했다. 볼턴 앞 좌석은 자리가 비어져 있다.

27일 친교 만찬 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볼턴은 회담 이틀째인 28일 확대 회담장에 나타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그리고 볼턴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북한 측에서는 김정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이 나왔으나 볼턴의 앞자리는 비워졌다. 이는 볼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됐다.

전날 두 정상의 단독 회담 때까지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는 이날 확대 회담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당초 두 정상은 회담을 마친 후 오찬과 합의문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모두 취소됐고, 결국 회담은 결렬된 채 마무리됐다.

◇ "볼턴, 협상 결렬에 큰 역할"…美, 대북 강경 노선 강화하나

2차 미북 정상회담이 끝나고 북한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은 볼턴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이나 비건 특별대표는 뒤로 빠졌다. 볼턴은 회담이 끝난 지 사흘 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지난 3일 폭스뉴스, CBS 등과 잇따라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방안과 상응조치를 담은 ‘빅딜’을 북한 측에 건넸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했으나 김정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협상 결렬 배경을 밝혔다.

다만 그는 회담의 결렬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합의는 없었지만 국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추후 협상의 여지도 열어놨다. 볼턴은 "비핵화 회담을 위한 만기일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낮은 수준에서 협상을 계속하거나 적절할 때 김정은과 다시 만나 대화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다"고 말했다.

미 조야에서는 볼턴이 이번 회담 결렬에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달 28일 전문가들을 인용해 "볼턴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담에서 마지막 몇 분 동안 한 역할이 협상 결렬에 중요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그동안 2차 미·북 회담을 주도해온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대신 볼턴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이상 기운을 직감했다고 전했다. 평화운동 단체 위민크로스DMZ의 크리스틴 안 창립자는 "(볼턴의 참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며 "볼턴이 회담에 참석한 것을 보고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도 볼턴이 이번 협상의 변수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로 칸나 미 하원의원은 28일 트위터를 통해 "미국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응원했지만, 그 옆에 볼턴이 있는 것을 보고 협상 실패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볼턴의 등장에 이미 협상 결렬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볼턴의 재등판과 관련,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다시 강경기조로 돌아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페인 연구원은 "‘그들을 폭격하라’고 주장해온 볼턴이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타협을 중시하는 대신 강경 노선을 선택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