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부는 대북 정책에서 '이념·환상·실험'부터 빼야 한다

조선일보
입력 2019.03.01 03:14

청와대는 28일 2차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했다. "트럼프가 밝힌 대화 의지와 낙관적 견해는 다음 회담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한다"고도 했다. 미·북 회담 결렬 못지않게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청와대의 상황 인식이 국민을 더 걱정스럽게 만든다.

정부는 지난 한 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라는 검증되지 않은 허상에 끌려 나라의 안보틀을 뜯어고쳤다. 마치 김정은이 북핵을 금방이라도 폐기할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 냈다. 북이 그동안 실행에 옮긴 것이 있다면 김정은 표현대로 '사명을 마쳐' 쓸모없어진 풍계리 핵실험장 입구를 폭파시킨 것뿐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언제나 '김정은이 비핵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으로 믿는다'고 해왔다. 한 개인이 김정은 말을 믿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그 사람이 대통령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혼자 속는 것이 아니라 5100만 국민을 핵 인질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

북핵 폐기의 실질 진전은 없는데 우리 안보 울타리는 계속 허물어졌다. 1차 미·북 회담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 상의 한마디 없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했다. 이 황당한 사태에도 우리 정부와 군은 항의는커녕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 조치라고 반겼다. 그리고 '9·19 남북 군사 합의'를 통해 북핵을 억지해야 할 우리 군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했다. 지금 북은 대한민국을 절멸시킬 수 있는 핵탄두 수십 발을 갖고 있다. 그 상당수는 이미 수소폭탄이다. 수소폭탄은 히로시마 원폭의 수십 배 위력을 넘는다. 그런데 군사 합의 1조 1항은 "쌍방은 무력 증강 등에 대해 남북 군사공동위를 가동해 협의한다"고 돼 있다. 이제 한국은 핵도 없이 재래식 전력 증강조차 북한 '동의'를 구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안보 포기나 다름없다. 문 대통령은 며칠 전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에서 "남북 경협까지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이번 회담 직전엔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면서 '신한반도 체제'를 선언했다. 김정은을 순진하게 믿고 미·북 협상 상황에서 소외돼 이런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엔 외교·통일·정보 부서를 담당하는 국가안보실 2차장에 통상교섭을 하던 사람을 임명했다. 미·북 회담이 잘돼 남북 경협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한 인사라고 한다. 그로부터 몇 시간 만에 미·북 회담은 결렬됐다. 김칫국을 마셔도 정도가 있다.

정부가 장기적 외교·안보 목표와 전략을 세우고 이를 추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안보 문제는 현실에 발을 딛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념이나 이상, 환상은 뜬구름에 불과하다. 안보는 실험이 허용되는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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