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다운' 방식 협상이 가져온 최악의 결과
美 코언 청문회 후폭풍...트럼프도 집중 못한 듯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벌인 2차 정상회담이 아무런 합의도 없이 결렬됐다. 회담을 앞두고 ‘스몰딜’ ‘빅딜’이 거론됐지만 ‘노딜’(no deal)로 끝난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그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를 둘러싼 양측의 인식차가 컸기 때문이다. 정상끼리 큰 틀의 합의를 해놓고 실무 선에서 세부 논의를 진행하는 ‘톱다운’(Top-down) 협상이 부른 ‘외교 실패’란 지적도 나온다. 미국 국내 정치에서 ‘코언 청문회’가 몰고온 후폭풍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① ‘비핵화’ 눈높이 간극 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이 이날 단독 회담에 이은 확대정상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비핵화 조치에 대한 양측의 눈높이가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회담 결렬 후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미국은 북한에 영변 핵시설 외에도 ▲고농축우라늄(HEU) 제조시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시설 ▲완성된 핵탄두의 해체와 사찰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이날 "핵목록 신고도 마찬가지"라고 밝힌 점으로 미뤄 핵 프로그램 신고도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해체하겠다면서 그 대가로 제재 해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실제 미국 조야에선 고철이 된 것이나 다름 없는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등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북이 원하는 대규모 제재망 해제에 응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고농축우라늄(과 그 제조시설)의 해체도 필요한데 김정은은 할 준비가 안됐다"고 했다. 그는 "북한 핵시설의 소재를 미국이 파악하고 있다"면서 사찰 필요성도 거론했다. 트럼프는 플루토늄 추출 시설이 중심인 영변 외에 고농축우라늄 해체 없이는 대북제재 전면해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해체만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대신 영변 핵시설 해체의 상응조치로 대북 제재 전면 해제를 요구했다. 김정은은 미국 측이 영변 외 핵시설 존재를 언급했을 때 당황한 기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일대에서 ‘영변 외(外) 우라늄 시설’의 존재를 발견한 사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영변+α’로 불리는 핵⋅미사일 시설 해체를 요구하는 미국과, 영변 핵시설만 해체하는 조건으로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한 북한 간에 인식 차가 너무 컸던 셈이다.
② ‘제재 해제’ 기대치도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확대회담에 들어가기 전 기자들 앞에서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 문제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미국의 ‘영변+α’ 요구를 거부하는 김정은을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카드로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은 애초 이번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해체 이상의 비핵화 조치를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정은은 이날 단독 회담에 들어가면서 "내 직감으로는 오늘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영변 핵시설 해체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재재망을 풀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란 관측을 낳는 대목이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도 "미국이 영변 핵 시설 전체 폐기는 물론 핵⋅미사일 생산⋅저장 시설까지 모두 보자고 한 것 같은데 핵포기 생각이 없는 김정은은 이같은 요구를 받을 수 없었을 것" 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 해체에 대한 대가로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해주는 것은 향후 완전한 비핵화에 걸림돌이 되는 ‘나쁜 거래’가 될 것이란 우려도 한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런 상태에선 합의를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북한의 대북제재 해제 요구는 매우 포괄적이었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 이외에 다른 핵 시설·물질을 폐기하지 않으면 의회와 여론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했다.
③ ‘톱다운’ 협상 방식의 문제
톱다운(Top-down) 방식도 협상 결렬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톱다운이란 지도자 간에 큰틀의 합의를 이뤄놓고 세부 사항은 실무 협상에 맡기는 방식이다. 실무 협상에서 타결짓지 못한 사안을 지도자 간 결단으로 매듭짓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난해 1차 미⋅북 정상회담의 후속 협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정상회담 당일까지 실무 의제 협상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번 정상회담은 이런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톱다운 방식은 협상에 임하는 지도자의 역량과 캐릭터, 심리 상태에 의존하는 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무 협상 단계에서 핵심 의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지도자 간에 이를 뛰어넘는 협상을 시도할 경우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바로 이같은 톱다운 방식의 함정에 빠져 파국을 맞은 경우라는 것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톱다운 방식 때문에 파장이 더 커졌다고 본다"고 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나 혼자 결정한게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무리 톱다운 협상이라 해도 차관급에서 협상이 안 되면 정상간 합의도 불가능하단 뜻"이라고 설명했다.
④ ‘코언’ 변수
트럼프 대통령의 옛 개인 변호사인 코언이 의회 청문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증언을 털어놓고 있는 상황도 이번 회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옛 변호사 코언은 27일(미국 동부 시각)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트럼프 대통령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공개 증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이번 회담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핵동결을 유지하면서 비핵화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만 보이면 트럼프 대통령도 협상을 타결짓고 이를 성공으로 포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있었다. 코언 이슈로 어려움에 처해 국면 전환이 필요한 트럼프가 북핵 성과로 국내 정치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협상을 깼다. 자칫 영변 핵시설 해체 수준에서 ‘비핵화' 협상을 마무리했다가 미국 내에서 부실 협상이란 책임론이 이는 것을 의식해 합의를 하지 않는 쪽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