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의 입] 트럼프에 ‘조아린’ 통화, ‘십자가’는 누가 지나

입력 2019.02.22 19:00


엊그제 문재인·트럼프 한미 정상이 전화 통화를 했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드디어 두 사람 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약 35분 정도 통화를 했다고 하는데, 인사말을 빼고, 또 양측 통역을 빼면 실질적인 대화를 얼마 나눴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밤에 청와대에서 밝힌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다는 발언이다.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고, 그것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신문도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에 ‘김광일의 입’은 몇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문 대통령의 어법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을 상대국 정상에게 하는 법은 없다. 독립적 주권을 가진 국가가, 그 신성한 주권을 위임 받은 우리 대통령이 상대국 정상에게 "당신이 요구하면" "나는 (무슨) 각오가 돼 있다"는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입에서 "(무슨)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은, 오로지, 권한을 위임해준 주권자, 즉 국민들께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어떻게 나라의 상징이요 일국의 대표인 대통령이 상대국 정상에게 대북 경협의 모든 경비와 부담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을 하는가. 이것은 전쟁에 진 어떤 패전국 대통령이 승전국 대통령에게조차 써서는 안 되는 표현법이다.

둘째. 설령 문 대통령이 비슷한 언질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우리 청와대 입으로 공개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문 대통령이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아무쪼록 성과를 내도록 이끌고 싶은 욕심이 넘치다보니, 앞으로 발생하는 경협 자금을 일부분 부담할 수도 있다는 뜻을 트럼프에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청와대가 그런 통화 내용을 공개할 것은 못 된다. 문 정권이 비록 북한 비핵화 협상 테이블의 의자에 앉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북한 비핵화의 협상에서 제1의 직접 당사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때 협상 당사자는 절대 협상 카드를 먼저 꺼내 보이는 법이 아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엄청난 뒷감당을 책임져야할 말을 쏟아놓고 말았고, 청와대는 그것을 발표하고 말았다. 나중에 트럼프나 김정은이 문 대통령의 발언을 근거로 나름대로 해석까지 덧붙인 뒤 마치 빚쟁이 독촉하듯 청구서를 내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셋째, 대북 경협 자금, 모든 경비와 부담을 떠안는 문제는 수십 조 원을 훌쩍 넘는 천문학적 액수가 예상된다. 경우에 따라 백 조 단위로 뛸 수도 있다. 당연히 국회의 승인 절차가 필요한 대목이다. 대통령은 엄청난 권한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국민 세금을 단 돈 1원 한 장도 쓸 수 없다. ‘떠맡을 각오’ 운운한 대목은 삼권분립 원칙과 국회를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 대통령의 발언은 일부러 에둘러서 간접적이어야 하고, 일부러 모호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전 실무 협상에서는 이젠 ‘비핵화’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 ‘비핵화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조건 ‘퍼주기 협상’을 하려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조선일보는 ‘비핵화가 사라졌다’는 톱 제목을 달았다. 이것은 1차 미·북 회담, 2차 미·북 회담을 거치는 사이에 어느덧 북한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는 뼈저린 지적이기도 하다.

지난해 4분기 소득 통계가 나왔는데, 최하위 20%, 즉 빈곤층 소득이 1년 전보다 무려 18%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세금으로 주는 공적 보조금을 빼면 무려 30%나 줄었다. 최저임금과 관련이 큰 근로소득은 37%가 줄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충격적 통계다. 그 사람들부터 살리겠다는 소득주도 성장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수출은 3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그런데 여유 있는 국민들은 해외에서 씀씀이가 커져 해외 카드 사용이 12%나 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대북 경협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문 대통령이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에는) 시간표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은 언제 거래가 이뤄질지도 모르는 저들에게 ‘무기한 백지 수표’를 써준 셈이다.

국민일보는 우리가 사실상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는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국민들 어깨에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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