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쥬가 먼디?"아마존에서 대박난 '메이드 인 영주' 호미

입력 2019.02.17 13:44 | 수정 2019.02.17 21:11

영주대장간서 만드는 호미, ‘아마존’서 불티
한국보다 5배 값에도 "혁명적 용품" 극찬
52년 대장간 匠人 "촌놈이 성공했구마"

"아마쥬가 뭔진 몰라도 3년전만해도 미국으로 열댓개 보내던 호미가 작년엔 2000개 이상 나갔부렀다네. 해외 수요가 10배 이상 늘어났으니, 반세기 대장장이 인생이 뿌듯하긴 하제." 14살부터 대장간에서 살아온 석노기(66) 영주대장간 대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영주에서 52년째 낫을 만드는 석노기씨는 지난해 ‘경상북도 최고장인(匠人)’에 선정됐지만, 그의 일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호미와 낫의 가격도 하나에 4000원. 그랬던 그의 호미가 아마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해외에서 잘 팔린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아마주인지 뭔지에서 인기가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 "미국에 이런 원예 도구는 없었다"
지난해 미국 온라인 쇼핑 사이트 ‘아마존’에서 한국산 농기구 ‘영주대장간 호미(Yongju Daejanggan ho-mi)’가 이른바 ‘대박’을 쳤다. 국내에서 4000원 가량인 이 호미는 14.95~25달러(1만6000원~2만8000원)로 국내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지만, ‘가드닝(gardening·원예)’ 부문 톱10에 오르며 2000개 이상 팔렸다.

오른쪽은 아마존에서 14.95달러(약 1만6000원)에 판매되고 있는 호미. ‘영주대장간, 코리안 스타일 호미’라고 적혀있다. 호미가 30도 각도로 휘어져 있는 반면, 왼쪽처럼 미국 등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예 도구는 날카롭거나 가파른 각이 지지 않았다. /아마존 웹사이트 캡처
ㄱ자로 꺾어진 ‘호미’는 손삽만 쓰던 외국인들에게는 ‘혁명적 원예용품’이었다. "30도 휘어진 날은 미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호미 쓰기 전에는 정원을 어찌 가꿨는지 의문" "덤불 베는 데 최고"라는 구매평이 쏟아졌다.


지난 15일 영주대장간 석노기 장인이 호미를 만들며 망치질을 하고 있다. /최지희 기자
◇이미 농촌선 ‘名品’..."14세 대장장이가 호미로 해외 진출까지"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지난 15일 오전 경북 영주시 휴전동에 자리잡은 영주대장간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쇠를 공이질하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수작업 풀무질 도구와 설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대장간 풍경은 사진에서나 봤던 수십년전 모습이다. 바깥 날씨는 영하 3도였지만, 장인은 벌겋게 달궈진 가마 앞에서 얇은 티셔츠만 입고 호미를 만들고 있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석 대표는 1968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매형이 하는 대장간에 들어가 의식주를 해결했다. 2년 뒤 ‘큰 물에서 대장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혈혈단신 공주에 있는 한 대장간에 들어가 눈칫밥을 먹었다. 석 대표는 "그 시절에도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대장간 일을 배웠다"며 "일꾼한텐 밥 대신 감자를 줘 3년 동안 지겹도록 감자로 배를 채웠다"고 했다.

1973년, 공주의 대장간에서 3년 간 호미·조선낫 등을 만드는 기술을 연마하고 나온 석 대표는 경북 영주로 내려와 지금 자리에 ‘영주대장간’ 문패를 달았다. 산간지역인 영주에서 각종 농기구 수요가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23세 청년의 예측은 적중했다. 5평으로 시작한 영주대장간은 수완 좋은 청년의 패기로 매년 크기를 키워갔다. 호미를 만들 때도 도라지 캐는 용·밭 매는 용·안동에서 쓰는 호미 등 용도별·지역별로 종류를 다양화했다. 여전히 영주대장간에서는 5가지의 호미를 생산한다.

영주대장간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5가지 종류의 호미. /최지희 기자
죽을 고비도 많았다. "80년대 들어 먹고살만해지니 너도나도 대장간을 열어 이 동네에만 대장간 5개가 생겼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남들이 못 만드는 작두나 약초캐는 거름지 창 등을 만들어 공급했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남아 한숨 돌리니, 중국산 농기구가 발목을 잡았다.

"영주 호미를 2000원에 팔 때 중국산이 600원에 들어오니 될 게임이 아니었제. 버티기가 힘들어 죽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어. 답은 품질 뿐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만드는 농기구에 영주대장간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 거여. 결국 중국산을 써본 농민들이 다시 돌아오더라고."

풍파를 버텨 생존해 온 영주대장간 농기구는 농촌에선 ‘명품’으로 알려져있다. 강원도 산골부터 부산 해운대까지 전국 곳곳에서 이곳 제품만 찾는 철물점도 수두룩하다. 이날 대장간을 찾은 농민 김장표(62)씨는 "석 씨처럼 매일 모든 농기구를 손작업하는 대장간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면서 "이곳에서 만든 20년 된 낫을 아직까지도 다시 갈아가면서 사용한다. 그만큼 튼튼하고 정교한 것"이라고 했다.

영주대장간은 2017년 ‘향토뿌리기업’과 ‘경상북도 산업유산’에 지정됐으며 석 대표는 지난해 ‘경상북도 최고장인’에 선정됐다. /최지희 기자
이곳 호미는 2013년부터 미국을 비롯해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등 세계 곳곳에 진출했다. 대장간 농기구를 해외에 온, 오프라인으로 수출 하고 있는 신웅철(53) 헬프팜 사장은 "외국 쇼핑몰에서는 영주 호미가 아닌 것도 이곳 대장간 이름을 달고 팔고 있다"면서 "중국에도 영주대장간 호미가 견본품으로 가 있다"고 했다.

해외 수요가 폭발하는 이유는 뭘까. 미국 등 인건비가 한국보다 비싼 서구에서 손작업이 필수적인 대장간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탓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0도, 90도 등 정교하게 휜 농기구가 드물다. 석 대표는 "한번은 미국 LA에서 늙은 교포가 찾아와 ‘미국에선 한국 농기구처럼 원하는 각도로 휘어지거나 날카로운 삽을 구하지 못한다’면서 호미랑 낫 등 수십개를 사갔다"고 했다. 해외에 나갈 때 선물용으로 구입하려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후계자 全無..."농업 40년 역사 서려있는데 없어지면 쓰겠나"
일흔을 목전에 둔 장인이 더 이상 망치를 두드리지 못하는 순간, 대장간 문도 닫아야한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12월부터 석 장인에게 후계자 양성 비용으로 한 달에 200만원 지원을 약속했으나, 석 대표는 "후계자 양성을 하고 싶어도 하겠다는 젊은이가 없다"고 했다.

지난 15일 영주대장간에서 석 대표의 매형(78)이 호미를 만들고 있다. /최지희 기자
그간 찾아온 몇 안되는 청년들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석 대표는 "애 우유값 벌겠다고 30대 남성이 찾아와서는 1시간 만에 도망간 적도 있다"고 했다. 삼복더위에 화기(火氣)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석 대표는 "한 여름에는 대장간 문 앞에만 서있어도 도살장같다"며 "가마 옆에 있다가 땀이 나면 30분도 안돼 소금이 낀다"고 했다. 그는 "또 어떤 청년은 일하나 불똥이 튀어 물집이 쪼마나게 잡혔다고 병원에 보내달라고 하니 일을 시킬 수가 있겠나"고 했다.

직업전문 한국폴리텍대학교 신정민 교수는 "안타깝게도 현재 대부분의 한국식 직업교육은 당장 교육을 받아 취직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서 "이런 대장간에서 나오는 물건은 해외경쟁력도 있을뿐만 아니라 한국의 농업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농기구 기술 노하우가 축적돼 있다는 점을 고려해, 후계자 양성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영주대장간에는 70대 노인 세 명이 비상근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매일 출근해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석 대표 뿐이다. 주문이 밀려와도 일할 사람이 없어 소화를 못하는 지경이다.

현재 영주대장간의 연매출은 대장간 유일 업체로는 국내 최고 수준인 6000만~7000만원. 석 장인은 "월 400만~500만원을 내 손으로 버는데, 남들이 보면 별로 큰 돈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에 내가 일군다는 느낌이 참 감사하다"며 쭈글쭈글한 손을 펴보였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망치질 할 거여."
지난 15일 영주대장간에서 석노기 장인이 호미를 만드는 영상. /최지희 기자


관련기사를 더 보시려면,

호랑이 담요, 돌솥… '할매 스타일'도 美서 불티 최지희 기자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