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차라리 없애달라” 광화문 세종대왕像 만든 김영원 작가의 읍소

입력 2019.02.01 10:50

"광화문의 세종대왕상(像)을 다른 데로 옮기면 흉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제가 무슨 낯으로 살지…"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앞. 외국인 관광객들이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상을 조각한 김영원(72) 전 홍익대 미술대학장의 표정은 씁쓸했다. 김영원 전 학장은 김경승, 김세중의 맥을 잇는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다. 그는 몇 번씩이고 자신의 작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김영원 조각가가 세종대왕상을 등지고 서있다. /권오은 기자
서울시는 지난 21일 광화문광장 재조성 설계도를 공개했다. 공모전 설계안은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을 이전하는 내용이었다. 먼저 고 김세중 조각가의 작품인 이순신 동상안을 옮기는 안을 두고 반대가 뜨거워졌다. 서울시 측은 "여론을 반영해 이순신 동상 이전(移轉)을 비롯, 설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상은 이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28일 서울건축포럼 주관 토크쇼에서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은 "서울시와 논의를 거친 뒤에 정해질 것"이라면서도 "심사위원 사이에서 이순신상은 50년 이상 존치됐으니 존중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고, 세종대왕상은 세울 때부터 논란이 됐으니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이전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김 전 학장은 "조각가 개인의 자존심 때문"에 이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종대왕이 지금은 남향(南向)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 명암이 잘 맞아요. 자상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으로 시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 옆, 동향(東向)으로 틀어버리면 맑은 날에는 빛이 과해 멍청해 보이고, 정오를 지나가면 역광으로 시커멓게 보일 겁니다. 그런 흉한 모습을 국민과 마주하게 한다면… 불손한 일입니다."

서울시가 지난 21일 처음 공개했던 광화문광장 재조성 설계 당선작 조감도.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상을 광장 바깥으로 이전하도록 돼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에 서 있는 인체 조형물 ‘그림자의 그림자(Shadow of shadow)’,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에 있는 역대 대통령 동상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런 그에게도 세종대왕상은 남다른 의미였다.
"대통령 동상이야 실력으로 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세종대왕상 만들 때는 정말… 발톱의 때만도 못한 제가 이걸 만드는 게 맞나 싶고, 몇 번이고 외국으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아픈 몸 추슬러 가며 힘을 쏟았어요. 동상 이전을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고민했을지 궁금합니다."

세종대왕상은 지난 2009년 10월 9일 한글날부터 지금의 광화문광장 자리를 지켜왔다. 당시 김 전 학장은 두 달간 광화문광장 일대를 돌며 궁리를 했다.

"북악산에서 경복궁, 광화문,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축(軸)’ 가운데에 성군(聖君)이자 애민(愛民)의 상징을 바로 세우고 싶었다"고 했다. 맞은편 이순신 동상과 함께 문무(文武)의 조화도 맞춰 나라의 오랜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았다. 그는 "역사의 중심에서 쫓겨나, 구석으로 내몰린 세종대왕상은 상징성을 잃는다"며 "옮기려면 차라리...차라리 정말 없애는 게 낫다"고 했다.

지난 2009년 경기 광주시 초월읍 김영원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제자들이 세종대왕상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상이 구시대적이며, 광장을 시민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오히려 텅빈 광장이야말로 권위주의의 상징"이라고 일축했다.

"과거 제국주의,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게 ‘뻥’ 뚫린 광장입니다. 열병식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만약 다 치워버리고 쭉뻗은 광장에서 사람들이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 뭡니까. 광화문이고 그 뒤에 청와대, 그러니까 권력입니다. 박원순 시장은 권위주의를 배격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논의하는 과정에서 광화문광장 재조성 관계자 중 단 한명도 원작자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 것에 허탈해 했다. "전화 한통 없었어요. 외국에서는 조형물을 옮기려고 하면 당연히 작가에게 묻습니다. 그냥 무작정 옮기려고 하면 야만인, 미개인 소리를 들을 일이에요. 심사자를 비롯해 다 문화예술인들인데, 이런 절차를 몰랐다면 놀랄 일이고…알고도 그랬다면 무슨 오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김 전 학장은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했었다"고 했다. 지난 2017년 그가 만든 박정희 동상이 논란이 됐던 기억 탓이었다. 그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세울 박 대통령 동상을 만들었다가 당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진영논리가 두렵습니다.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예술파에요. 예술가로서의 제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은 자꾸 소모적인 논쟁으로 몰아갑니다. 나라의 상징을 옮기는 일을 두고도 만약 진영논리로 몰아간다면…정말 그게 나라입니까?"

김 전 학장은 지난 30일 박 시장에게 서울시청 홈페이지를 통해 세종대왕상 이전에 따른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의 질의서를 보냈다. 그는 "부디 소(小)를 위해 대(大)를 잃는 우(愚)를 범하지 않고 현명한 대처를 하길 기대합니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광화문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상, 세종대왕상, 경복궁 앞에서 전통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 일은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의 유행 중 하나다. 지난해 11월 광화문 광장을 찾은 관광객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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