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21세기 관객도 울린, 이 사내의 핏빛 절규

조선일보
  • 양승주 기자
    입력 2019.01.31 03:00

    오이디푸스

    실험과 파격이 주류가 된 무대에서 '정통'은 오히려 신선했다. 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 연극 '오이디푸스'(서재형 연출)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였던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21세기 관객 역시 울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천형(天刑)과도 같은 신탁을 끝내 피하지 못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 오이디푸스로 분한 황정민이 신을 향해 "이제 만족하십니까?"라고 절규하자 객석은 도리 없이 훌쩍거렸다. 감각적인 무대와 세밀한 연출, 그리고 단단한 연기의 합이 빚어낸 묵직한 90분이었다.

    연극‘오이디푸스’에서 이오카스테(배해선)가 목숨을 끊자 오이디푸스(황정민)는 자신의 눈을 찌르며 절규한다.
    연극‘오이디푸스’에서 이오카스테(배해선)가 목숨을 끊자 오이디푸스(황정민)는 자신의 눈을 찌르며 절규한다. 이 순간 천장에선 핏빛 천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샘컴퍼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새로운 왕이 된 오이디푸스(황정민)는 가뭄과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정은혜)를 찾아간다. 테레시아스는 이 위기가 선왕(先王)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자가 누구인지 밝히려 하지 않는다. 아내 이오카스테(배해선)의 만류에도 예언자를 다그치던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 살인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끔찍한 신탁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내 깨닫는다.

    황정민은 역시나 노련했고, 어디서 힘을 줘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연극적인 대사와 톤은 비교적 담담하게 소화했지만, 감정이 극에 달할 땐 눈동자부터 발끝까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시신을 껴안고 "어머니, 어머니, 엄마!"라며 아이처럼 울부짖는 장면에선 모든 것이 일순 고요해졌다.

    이 연극은 그러나 황정민에게만 방점을 찍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뮤지컬과 연극에서 20년 넘게 활동해 온 배해선의 연기가 특히 반짝였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편에게서 남편을, 자식에게서 자식을!"이라고 흐느낄 때 관객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오카스테의 비극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상과 조명, 소품을 세련되게 활용한 무대 연출도 돋보였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를 때 천장에서 바닥까지 핏빛 붉은 천이 쏟아지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비극이지만 인간이 어려움을 딛고 서는 그 순간을 두껍게 그려내고 싶었다"는 서재형 연출의 말대로 이 연극은 모든 운명을 겪어낸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에 집중한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멀게 한 오이디푸스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테베를 떠난다. 왕의 옷을 벗고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옷만 걸친 채 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떠난 테베에는 오랜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린다. 2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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