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문학에서 이뤄진 민족자결 운동

조선일보
  •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입력 2019.01.28 03:00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5] 한국 최초 문예지 '창조' 발간 100년
    일본 유학생 김동인·주요한이 3·1운동 한 달여 앞두고 창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운동을 불과 한 달도 안 남기고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라 할 '창조'가 모습을 드러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예지‘창조’연구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창조’원본을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아단문고에서는‘창조’발간 100년을 기념해 창조 1~9호 원본을 공개했다.
    문예지‘창조’연구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창조’원본을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아단문고에서는‘창조’발간 100년을 기념해 창조 1~9호 원본을 공개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모친인 고(故) 강태영 여사가 수집한 근현대문학 자료들을 소장한 곳이다. 창간호부터 강서고분벽화 현무도가 그려진 1주년 기념호(5호)가 눈길을 끌었다. /박상훈 기자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환, 최승만 등이 모여 1919년 2월 1일 자로 펴낸 동인지가 바로 '창조'다. 그런데 김동인은, 이 동인지가 세상의 빛을 쏘인 것은 2·8 유학생 독립운동이 나던 날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동경 유학생들이 크리스마스 축하를 핑계 삼아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운동을 결의하던 1918년 12월 25일 밤, 김동인과 주요한은 하숙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월간지 '창조'를 구상했고, 2·8 독립선언을 둘러싸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소요'가 벌어진 날 김동인 또한 경찰에 체포된다. 김동인의 검속 사실이 신문에 나자 평양 집에서는 '어머니 위독'이라는 거짓 전보로 그를 조선으로 불러들이는데, 이것이 또한 그를 3·1운동의 회오리로 몰아넣는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아우가 격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들어준 죄로 경찰에 3개월 구금된 끝에 6개월 징역형 2년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받고 나서야 풀려난다.

    '창조'가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 잡지였다는 사실, 김동인이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를 본받은 오스커리즘의 계승자였다는 사실은 결코 단순한 범주 구분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2·8 유학생 독립운동이나 3·1운동이 정치운동의 방면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자기 결정(self-determination)"을 "민족 자결"로 해석하면서 거사를 일으켰던 것처럼, '창조' 역시 문학운동의 측면에서 민족 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자기 문제로 끌어안으려 했던 문학사적 시도였던 것이다.

    100년 전 '창조'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단연 김동인의 창작과 비평이 눈길을 끈다. 우선 이 '창조'라는 제목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김동인 회상에 의하면, 그가 이 이름을 제안하자 '절친' 주요한은 종교적 색채가 난다며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인지 제목은 결국 '창조'가 되었으니, 이는 당시 유학생 사회의 사회적·문화적 담론의 변화를 예민하게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무렵 지식인 사회의 지적 담론을 주도하던 '학지광'이나 '천도교회 월보' 등은 다윈의 이론에 뒤섞여 들어온 사회 진화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대두하면서 "현재에 작용한 행위는 장래에 운명"이 된다거나(이돈화), "우리의 '손'에는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고 재건할 금강력"이 있다는(이광수), 새로운 '창조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1일 간행된‘창조’창간호.
    1919년 2월 1일 간행된‘창조’창간호. 한국 최초의 자유시인 주요한의‘불놀이’와 김동인의 등단작인‘약한 자의 슬픔’이 실렸다. /박상훈 기자
    바로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 김동인은 당시 지식인 사회의 첨단 담론인 신칸트주의, 생철학 등을 참조하는 가운데 특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서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위한 선언을 이끌어 낸다. "창조하는 자가 비로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한다" "약자는 강자를 섬겨야 한다" 같은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김동인이 '창조'에 쓴 첫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 마지막 9호에 쓴 '배따라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인 강한 삶에 대한 희구를 발견할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인간을 넘어서 초인, 곧 '위버멘슈(Übermensch)'를 추구했다. 바로 그렇게 김동인의 '창조'는 "현대 사람의 약점"을 넘어서는 강한 자의 예술을 추구했다. 이처럼 '창조'는 역사적 정치 운동의 물결 위에서 탄생해 현대라는 바다에서 어떤 인간을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명론적 고민과 기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창조'와 그 주역 김동인에게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대일 협력, 반페미니즘 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창조

    한국 최초의 순 문예지 '창조'는 1919년 2월에 창간해 1921년 5월 9호로 종간됐다.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등 동경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한국 최초의 자유시인 주요한의 '불놀이', 김동인의 '배따라기', 전영택 '천치냐 천재냐' 등이 창조를 통해 발표됐다. 계몽주의 문학을 거부하고 사실주의를 이끌었으며, '~이다', '~었다' 같은 근대적 소설 문체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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