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통령까지 일본에 분노만 할 텐가

조선일보
  • 임민혁 논설위원
    입력 2019.01.22 03:15

    '물밑 외교' 노력 없이 대통령까지 계속 강경하면 韓·日 관계 더 꼬일 뿐
    양국 정상 통화라도 해야

    임민혁 논설위원
    임민혁 논설위원
    새해 첫 국무회의가 끝난 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법무장관, 법제처장 등 몇몇 각료들을 따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이에 따른 한·일 갈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요지는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일본 기업의 문제이지 우리 정부가 앞장서면 안 된다' '일본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 등이었다고 한다. '일본에 대해 더 세게 나가라'는 지침으로 해석됐다. 일부 참석자가 "일본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며, 그동안 우리 정부도 징용 피해자 문제가 해결됐다고 판단한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며칠 뒤 외교부 고위 간부가 청와대에 올라갔다. 한·일 관계 관리를 위해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건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청와대 참모들은 "우리라고 (대통령에게) 그런 얘기 안 해봤겠느냐"며 이 간부를 돌려보냈다.

    강제징용 이슈에는 역사·법·외교·국민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때문에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제각각이다. 그중 가장 강경파가 문 대통령이라고 한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한 것은 그나마 절제된 발언 축에 속한다.

    문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한 여권 인사는 "대통령의 개인적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2000년 부산지법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처음 냈을 때 문 대통령은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 변호사로 이들을 대리했다. 김외숙 법제처장도 당시 변호팀 멤버였다. 문 대통령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니 도와야 한다"며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이후 18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판결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열렸으니 그의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변호사 문재인'이 "사법 판단에 따라 타협 없이 일본에 받아낼 것을 받아내자"고 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 문재인'은 변호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주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고민했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 '징용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정한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였다. 당시 이 결정을 내린 위원회에는 문 대통령도 민정수석으로 참여했다. 행정부가 이를 뒤집는 것은 사법부 판결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부담이다. 이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입장은 무엇인가.

    문 대통령이 감수하려는 한·일 관계 악화의 '마지노선'이 어디인지도 불투명하다. 아베 정권이 압박에 굴복해 우리가 원하는 사과·배상을 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정부 내에 아무도 없다. 양국의 정면 충돌은 사실상 예정돼 있다. 그 경우 북핵 위협에 대응한 안보 협력에 구멍은 안 생기는지, 경제적 타격은 어떻게 대응할 건지, 국제 여론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돌릴 건지 책임 있는 당국자의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과거사(史)는 과거사, 미래를 위한 협력은 별개'라는 공허한 구호만 있을 뿐이다.

    애초 원인 제공은 일본이 했고 그럼에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우리 모두 분노한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분노만 하고, 현실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물밑 외교를 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 꼬인다. 양국 정상이 통화라도 할 법하지만 그럴 계획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많은 외교 원로·전문가들이 "일본에 가차없는 건 좋은데 그 이후 전략은 뭐냐. 전략이 있긴 한 거냐"고 문 대통령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