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한미동맹 흔들리면 中國 우릴 우습게 봐… 이젠 '실사구시' 정책 펼 때"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9.01.21 03:10

    문희상 국회의장

    국회의장실에서 3당 원내대표가 신년 첫 만남을 가졌을 때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돼지해를 맞아 야당 요구에 '안 되지'가 아니라 '돼지 돼지' 응답해달라"고 하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자꾸 내 앞에서 돼지 돼지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웃음판을 만들었다.

    아직 신년이라 문희상(74) 국회의장 인터뷰는 덕담으로 시작했다.

    ―돼지해(己亥年)에 좋은 일 많기를 빕니다. 그런데 의장께서는 본인의 외모로 '자학(自虐) 개그'를 하신다고요?

    "자학이 아니라 사실인데요. 내가 뚱보잖아요. 돼지를 게으르고 우둔하게 보지만, 외국에서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가축으로 칩니다. 또 돼지는 분수를 압니다. 쩝쩝 게걸스럽게 먹어도 음식물이 위(胃)의 70%까지 차면 안 먹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위의 120% 이상 먹을 수 있지요."

    ―몇 달 전 김성태 의원은 원내대표 연설에서 "블루하우스(청와대) 스피커"라고 의장님을 공격했지요?

    "나는 의회주의자로서 야당 편인데 똥·된장 구별 못 하고 '청와대 스피커'라니…, 그날 고구마를 사들고 와 사과해서 금방 받아줬어요. 그렇게 의장을 모욕하면 국회를 모독하는 게 됩니다. 같이 똥바가지 쓰는 것이지."

    ―여당은 청와대의 오더를 받고 움직이는 '청와대 출장소'라는 비판을 가끔 받지요?

    "지금 여당은 덜해요. 오히려 야당이 모든 사안을 대통령의 결심으로 풀려고 합니다. 연말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지역구 투표와 함께 정당 득표율로 전체 의석 수를 나누는 제도)를 요구하는 단식을 하면서 내게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오라'고 했어요. 국회 안에서 풀면 되지 왜 대통령에게 의지합니까. 국회의장이 된 뒤로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얘기를 한 적 없지만 이번에는 야당대표 굶어 죽는 꼴을 못 봐 갔어요. 문 대통령은 선거제 개혁은 자신의 평소 소신이라고 했어요."

    문희상 의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보수라면 나는 ‘왕보수’다”라고 말했다.
    문희상 의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보수라면 나는 ‘왕보수’다”라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당초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선 공약이었는데, 대통령의 의사를 재확인하고서 여당은 협상 모드로 바뀌었지요?

    "여당이 선거제 개편 협상을 거부했던 게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지. 문 대통령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말은 안 썼어요."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문 대통령이 선거제 개혁에 동의했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손학규 대표는 그렇게 알고 단식을 푼 게 아닙니까?

    "나는 분명히 그렇게 전했어요. 자기가 착각했든 해석을 어떻게 했든, 그렇게 해서 단식을 그만둔 게 정치적으로 중요하니까."

    ―그런가요? 의장 임기 중에 개헌과 선거제 개편이 과연 이뤄지겠습니까?

    "둘 다 해야지요. 제왕적 대통령제는 안 된다는 게 촛불의 명령 아닙니까. 문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권한으로 이미 개헌안을 내놓았어요. 대선 공약을 지킨 셈이지요. 그렇게 책임에서 벗어났으니 개헌 문제로 대통령 탓을 못 해요. 어찌 보면 정치 고수지만, 내가 대통령이라면 그렇게 안 했을 겁니다."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여야가 합의가 안 될 안(案)을 내고는 공약을 지켰다고 책임에서 벗어났는데…, 여야가 합의할 수 있게 앞장서 유도해야지요. 어쨌든 대통령 안(案)을 제쳐두고 국회에서 우리끼리 합의할 수 있는 안을 만들면 되는데, 아예 논의 자체를 거부한 야당은 할 말이 없어요. 족제비도 낯짝이 있지."

    ―현 정권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는 바뀐 게 없지요?

    "그들(청와대)은 '제도적으로는 그래도 지난 정권과는 사람이 다르니 운영이 다르다'는 거죠."

    ―그런 생각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게 보겠지요. 이게 문제이지요. 상대를 수용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 양보하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인데…, 내가 협치(協治)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의장께서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코드 인사나 보상 인사는 끝내고 실사구시적 측면에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써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친문(親文)인 노영민 비서실장과 강기정 정무수석이 임명됐지요. 말이 전혀 안 먹혔군요.

    "나는 충고했을 뿐입니다. 창업할 때는 공신을 씁니다. 정권이 출범하면 개혁을 내세우고 과거를 비판합니다. 그게 권력의 생리입니다. 권력에는 살부(殺父)의 본능이 있어요. 이 때문에 정권 초기에 코드 인사를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하지만 성과와 실적을 내야 할 수성(守城)의 시기에는 전문가를 안 데려올 수 없습니다. 이번에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은 3선(選) 의원이고 그런 전문가들이지요."

    ―그러면 이번 청와대 인사는 의장님 주문대로 된 것이군요.

    "그런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앞으로 있을 내각 인사입니다. 이제는 야당 인물 중에서도 갖다 써야 합니다. 코드 인사로 실적이 안 나면 개혁 동력이 상실됩니다. 이는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연두 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꼭 가야 할 길"이라며 경제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했지요. 대통령은 당위적 도덕과 현실적 경제를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모든 정치인이 둘 사이에서 헷갈려 합니다. 대통령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만약 경제정책을 확 바꾸겠다고 했으면 정말 난리 났을 겁니다. 옛날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조는 바꿀 수 없지만, 연설 곳곳에 '경제가 어렵다' '고용 문제를 인식했다'는 표현은 나옵니다. 나름대로 조정이나 속도 조절을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의도와는 반대로 저소득층이 더 어려워졌고 청년 실업률은 더 높아졌습니다. 현실에서 다른 결과로 나타나면 궤도 자체를 수정하는 게 맞지요. 문 대통령은 현실이 아닌 이론을 숭배합니까?

    "문 대통령은 원칙을 중시합니다. '고구마'라는 별명을 왜 얻었겠습니까. 그러나 통찰력과 유연성이 있습니다. 내가 노무현 정부의 초대 비서실장에 내정된 뒤 문재인 민정수석 통보를 듣고는 '백면서생이 무슨 민정수석을 하느냐'고 반대하니, 노 대통령이 '나보다 일곱 살 아래인데 말을 낮추지 않았다. 통찰력 있고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있다'고 했어요. 그 뒤로 나도 그걸 느꼈습니다."

    ―그전에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니 그가 '도그마(dogma)적 인간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더 지켜보세요. 이제 유연성을 발휘하고 실사구시 정책으로 바꿔갈 것으로 봅니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최보식 선임기자
    ―현 정권에서 백지화한 '신한울 3·4호기'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고 송영길 의원이 주장했지요?

    "송 의원이 이를 공론화에 부쳐보자고 한 것에 대해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에 찬성한다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라, 공론화에 부쳐보자는 송 의원의 발언을 막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묻는 겁니다.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대립·갈등·원한·증오·적개심이 국민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적은 없었습니다. 현 정권은 '국민 통합'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열이 과거보다 더 심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정치의 가장 큰 목표는 '국민 통합'입니다. 국민 통합이 빵점이면 대통령 실적도 빵점이 됩니다. 대통령께 초심(初心)을 잃지 말라고 조언했어요. 적폐 청산은 쾌도난마로 한순간에 끝내야지 질질 끌면 인적 청산과 정치 보복으로 비칩니다. 지지 기반이 흔들립니다."

    ―현 정권의 행태를 보면 '적폐'로 몰았던 박근혜 정권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때보다야 낫지요. 정권 초기에는 기득권의 방해로 개혁이 진행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봅니다. 특히 기득권 지식인들이 정략적 사고로 혁명적 변화를 거부하고 통합 국면에 고춧가루를 뿌려 어려워진 면도 있습니다. ."

    ―고춧가루를 뿌린다고 하는데, 언론인 입장에서는 현 정권이 합리와 상식의 선을 무너뜨렸다고 봅니다. 사회주의 체제로 가고 있다는 우려도 있고요.

    "사회주의 체제라는 게 말이 됩니까. 더불어 잘사는 세상, 인간이 존중되는 세상을 이루려는 게 진보라면 나는 '완전 진보'입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보수(保守)라면 나는 '왕보수'입니다. 그게 헌법의 기조입니다. 보수의 가치가 없는 세상은 살 의미가 없는 세상입니다. 자유와 평등 중에서 나는 자유를 우선 택합니다."

    ―현 정권이 남북 관계에서 과속(過速)을 한다는 말도 있는데, 의장께서는 김정은을 믿습니까?

    "석 달 전 루마니아 대통령이 같은 질문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정은이 대화에 응하지 않을 수 없고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이 갔다는 겁니다. 바보가 아닌 한 그는 실용적인 접근을 할 겁니다."

    ―향후 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내놓는 조건으로 북핵을 인정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주한미군 철수나 미군 핵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는 것을 포기하는 식의 거래를 느닷없이 할까 우려됩니다."

    ―의장께서도 그런 점을 걱정하는군요.

    "한·미 동맹은 안보의 근간입니다. 그게 흔들리면 중국이 우리를 우습게 봅니다. 한·미·일 공조가 돼야 합니다."

    ―청와대 실세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한·미 간 이견이 노출되고 한·미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한·미 간에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외교부, 국방부, 국정원마다 미국의 대화 파트너가 있습니다. 북한 대응에 대해 서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어요. 바깥에서 떠드는 것은 추측이고 이게 사실입니다. 다만 트럼프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북한과 느닷없는 딜을 할까 봐 우려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다음 달 미국을 방문합니다."

    어떤 사안에선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대담은 부드럽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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