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더가 온다] ② 방치된 공간의 쓰임새를 탐구하는 공간혁신가

입력 2019.01.15 06:00

최근 스타트업 업계에는 남다른 큐레이션으로 주류 시장에 진입한 청년 창업자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금맥을 발견했을까? 넘치는 정보와 재화 속에서 우수한 콘텐츠를 선별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리더, ‘큐레이더(Curader=Curation+Leader)’. 방황 속에서도 도전과 지속을 꿈꾸는 청춘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이 시대의 큐레이더들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손창현 OTD코퍼레이션 대표
버려진 건물에 맛집 편집숍, 음식 먹는 서점 등 ‘세상에 없던 공간’ 만들어
"아크앤북, 우리나라에서 가장 책을 많이 파는 서점 될 것"
1월 말 도시재생+공장 플랫폼 결합한 성수연방 선보여

버려진 건물의 공간을 ‘셀렉 다이닝’이라는 콘텐츠를 채워 핫플레이스로 만드는 손창현 OTD코퍼레이션 대표. 그는 공간기획의 핵심을 ‘사람’이라고 말한다./이태경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인근에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음식을 먹고 차도 마시고 책도 볼 수 있는 서점 아크앤북(ARC.N. BOOK)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방치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없던 서점’으로 변신에 성공했고, 지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을 만든 이는 손창현 OTD코퍼레이션 대표(42)다. 맛집 편집숍이라 불리는 셀렉 다이닝(Select Dining)을 만든 인물로, 서울 건대스타시티 건물 ‘오버더디쉬’, 광화문 디타워 ‘파워플랜트’, 여의도 SK증권빌딩과 명동 파이낸스센터에 ‘디스트릭트’ 등을 열어 대박을 터트렸다. 손대는 곳마다 핫플레이스를 만들었다고 해 ‘미다스의 손’이란 별명도 얻었다.

◇ 버려진 공간에서 가치를 찾다

손 대표는 서울시립대 건축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딜로이트안진 부동산 재무자문, AM플러스 상업시설개발 운영팀, 삼성물산 개발사업부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2014년 독립한 그는 우연히 서울 자양동 스타시티 3층을 채워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지하철역과 연결되고 아래층엔 국내 매출 2위 영화관도 있었지만, 3년째 공실을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었다. 손 대표는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음료 맛집을 모아 ‘오버더디쉬’를 열었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보는 푸드코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결과는 대성공. 대형 유통사도 못 한 일을 해내니 ‘공간 좀 살려달라’는 제안이 빗발쳤고, 그렇게 ‘셀렉 다이닝’을 콘셉트로 다양한 공간을 만들었다. 2014년 3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도 2018년 1250억원으로 뛰었다.

’셀렉 다이닝’의 개념을 처음 선보인 ‘오버더디쉬’./OTD 제공
"보통 상가를 기획할 때 입지 조건부터 보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버려지고 방치된 공간을 발견하고, 쓰임새를 연구합니다. 공간을 싸게 임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넉넉함이 있죠.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셀렉 다이닝이라는 개념도 만들 수 있었고요."

셀렉 다이닝의 핵심은 다양성과 융합, 사람이다. 단순히 맛집과 프랜차이즈를 골라 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연구한다. 공급자의 시선이 아니라 수요자의 시선이다. "단순했어요. ‘왜 맥줏집에는 맛있는 안주가 없지?’ ‘왜 맥줏집에선 점심에 장사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 공간혁신의 핵심은 입지가 아니라 ‘사람’

아크앤북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획됐다. 아크앤북이 있는 부영을지빌딩 지하는 을지로입구역과 최대 상권인 명동을 지척에 두고 있지만, 층고가 낮고 공간이 좁아 몇 년째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손 대표의 손을 타고 근사한 서점으로 탈바꿈했다.

아크앤북은 책을 소비하는 방식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서점은 베스트셀러를 앞세우지 않는다. 팔릴만한 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책을 구성한다. 큐레이션이라는 주제 아래, 책을 중복해 진열하기도 한다. 곳곳에 식당과 카페를 배치해 책을 보면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처음엔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서점이라 하니 고객도, 출판계도, 외식업계도 반신반의했다. 책이 오염되면 어쩌나, 출판사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한 유튜버는 일부러 책에 커피를 흘리는 장난을 쳤다. 아크앤북은 오염된 책을 반품하지 않고 사입한다. 손대표는 여러 우려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생각보다 지적 수준과 교양이 높습니다. 더 조심해서 책을 대하고, 오염이 되면 직접 사가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아크앤북은 밥도 먹고 책도 보는 서점입니다. 우리처럼 충동 구매가 많은 서점도 없을걸요?” 아크앤북의 명소인 ‘북 터널’에서 포즈를 취한 손 대표./이태경 기자
책은 생각보다 잘 팔렸다. 개장 5주 차 매출이 첫 주보다 5배 올랐다. 성과가 나자 처음엔 책을 내주지 않던 작은 출판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용인에 문을 여는 롯데몰에도 대기업 서점을 제치고 입점이 확정됐다. "손익분기 시점을 6개월로 잡았는데 한 달 만에 달성했죠. 아크앤북은 취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게 한 이유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체험시키려는 목적이죠. 그 끝엔 책을 사는 거고요. 아마 우리처럼 충동 구매가 많은 서점도 없을 겁니다. (웃음)"

요즘엔 모두가 일본 츠타야 서점을 흉내 낸다. 쇼핑몰에도 카페에도 의류 매장에도 책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책은 공간을 구성하는 용도일 뿐, 소비하는 주체가 아니다. ‘리딩테인먼트(Reading+Entertainment)’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오히려 서점과 출판사들은 책이 안 팔린다고 성화다.

"한 서점에 갔더니 간판만 빼면 츠타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테리어가 똑같더군요. 다른 점은 사람이 머물 공간이 없다는 거였어요. 무조건 책을 많이 진열해야 잘 팔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미 온라인 서점이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은 취향을 찾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온라인 유통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채우지 못하는 게 바로 취향이죠. 아마존 시대에도 존재하는 오프라인 서점, 그게 아크앤북의 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책을 많이 파는 서점이 될 거예요."

◇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것에 도전하라

사람들은 손 대표를 혁신가라 부른다. 이전까지만 해도 ‘혁신’은 IT업계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처음 벤처기업 등록을 할 때만 해도 부동산 업체가 무슨 벤처냐며 타박을 받았지만, 지난해 ‘올해의 벤처기업’으로 선정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받았다.

"새로운 공간을 론칭할 때마다 듣는 말이 있어요. ‘어? 내가 생각했던 건데?’ 이 말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것. 사실 취향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서촌 어느 만둣집, 가로수길 무슨 카페가 화제인지는 SNS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요즘 츠타야 얘길 많이 하는데, 사실 한국인들이 츠타야를 찾은 지는 꽤 오래됐어요. 단지 ‘선례가 없다, 위험 부담이 크다’라는 핑계로 만들지 않았을 뿐이죠."

유명 맛집과 세계 맥주를 모은 맥주 바 ‘파워플랜트’./OTD 제공
손 대표는 이달 말 또 하나의 실험에 도전한다.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여는 생활문화 공간 성수연방이다. 화학 공장이었던 부지를 재활용한 곳으로, 제조·유통·판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작은 사업체를 모았다.

성수연방은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소사이어티 플랫폼을 지향한다. 셀렉 다이닝에서 한 단계 나아가 생산부터 소비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는 플랫폼이라는 의미로 ‘셀렉 다이닝 2.0’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수제 캐러멜 공장, 인도의 맥주 양조장, 존쿡델리의 고급 살라미 공장 등 생산 공장을 비롯해 독립서점 형식으로 재구성한 아크앤북, 플리마켓 띵굴시장과 협력해 기획한 라이프스타일숍 등을 선보인다.

"한때 제조업의 중심이었던 성수동의 정체성을 살려 작은 공장들을 구성했습니다. 기존의 OTD가 건물의 버려진 공간에 콘텐츠를 심었다면, 한 단계 나아가 도심의 일부를 바꾸는 것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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