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정치인도 방송인도 '갑튀사' 한 방 날리는 말, 점점 독해지고 있다

입력 2019.01.12 03:00

세 치 혀의 가벼움 칼이 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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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안병현
"사람은 언제 말해야 하는가. 더는 침묵이 용인되지 않는 바로 그때 말해야 한다. 사람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 자신이 이미 극복한 일만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세 치 혀의 가벼움을 이처럼 경계했건만 요즘 한국 사회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침묵 끝에 묵직한 한마디 내뱉기보다 쉴 새 없이 '말 폭탄'을 쏟아낸다. 잘 모르는 분야도 거침없다.

'갑튀사'…점점 더 독해지는 말

막말에 대한 대중의 내성은 점차 강해져 맹독성 막말이 범람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치인들의 막말을 보자. 최근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저격이 대표적인 예. '가증스럽다'는 형용사가 등장했다. 손 의원은 지난 2일 페이스북에 '나쁜 머리 쓰며 의인인 척 위장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떠드는 솜씨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가 다음날 신 전 사무관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글을 삭제했다. 하지만 하루 쉬고 5일에는 신 전 사무관을 '양아치'로 비유한 역사학자 전우용씨의 글을 다시 공유했다. 시민단체는 손 의원을 고발했다.

지난달 1인 유튜브 'TV홍카콜라'로 돌아온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첫 방송부터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 '막말 대가'의 귀환을 알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체코 방문을 거론하며 정상회담을 대가로 문 대통령과 북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경남지사로 근무하다 다시 여의도로 와보니 각 당에는 사이코패스도 있고 소시오패스도 있었습니다" "(청와대에서) 화성인의 DNA 수준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참 그렇습니다" 등의 말을 쏟아냈다.

지난 연말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내 장애인위원회 행사에서 "정치권에 정신장애인이 많다"고 해 장애인 비하 지적을 받았고, 극우 논객 지만원씨는 지난 5일 집회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향해 "나경원 그 XX 여자 아니에요"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왜 정치인의 혀는 더 독해지는 걸까. 데이터 분석 기관 '인사이트케이' 배종찬 소장은 "유튜브·페이스북 등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나오면서 '갑튀사(갑자기 튀어야 산다)' 심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 소장은 "여러 채널에서 엄청난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에 차별화하기 위해선 무조건 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선 '호감 못지않게 비호감도 정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네 편 내 편 고려 없이 '나부터 튀고 보자'는 심리가 커졌다"고 했다. 그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지만, 지지자들은 SNS상에서 더 결집한다. 점잖지만 심심한 '유재석 스타일'보다는 욕은 먹지만 튀는 '김구라 스타일'에 마니아층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논리”라면서 “결국 막말을 뱉은 이들의 확증 편향이 심해져 또 다른 막말을 낳게 된다”고 분석했다.

달변의 부메랑

다변(多辯), 달변(達辯)도 악담만큼이나 문제다. 최근 몇 년간 ‘알쓸신잡’ ‘어쩌다어른’ 등 지식 콘텐츠에 기반한 프로그램이 인기 끌었다. ‘입담 좋은 잡학박사’들의 몸값이 높아졌다. 유시민 작가, 소설가 김영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건축가 유현준 등 출연자들은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이라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지식셀럽(‘지식’과 유명인을 뜻하는 ‘셀러브리티’의 합성어)’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여행·역사·미식 등 다양한 테마를 ‘지식’과 결합시킨 TV 강의도 줄을 이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출연자나 연사를 섭외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의 지식 수준보다는 얼마나 맛깔스럽게 ‘썰’을 풀 수 있느냐”라며 “‘말발’이 있어야 사람들이 명강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 강의는 명강의로 포장돼 인터넷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전파된다.

문제는 임금도 아닌데 모든 정사를 아우르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지식 셀럽의 경우다. 정치·사회·과학·예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한다. 미학자가 정치를 논하고, 정치평론가가 예술을 말한다. 전문가들이 수십년을 공들여 연구한 분야도, 여러 가설이 난무해 아직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주제도, 한마디로 정리하고 명쾌하게 재단한다. 한 방송사 프로듀서는 “팩트 오류가 있을까 봐 10시간을 꼬박 촬영해 1시간 방송을 내보낼 정도로 ‘짠물 편집’을 하고, 교차 검증을 하고 있다”면서도 “모든 걸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기에는 시간적·물리적 제약이 있다”고 토로했다.

황근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는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전문 서적과 논문으로 검증된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데, 대중 인지도가 권위 있는 주장의 근거처럼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청률에 사로잡혀 ‘정확한 말’보다 ‘청산유수’를 선호하는 방송의 생리도 이 어처구니없는 혼란의 원인 중 하나다. 황 교수는 “지적(知的) 권위를 갖췄다고 보기 어려운 개인에게 과도한 권능을 부여하고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미디어의 책임도 있다”고 했다.

말발 우선주의’의 그림자

최근 들어 ‘지식셀럽’의 인기는 한풀 꺾이는 추세다. 얕은 지식이 제 발목을 잡거나 거침없이 내뱉었던 독설로 역공을 받는 이들이 적잖다.

‘알쓸신잡’ ‘수요미식회’ 등에서 박학다식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던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0월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언급하며 “방송 중 나온 막걸리 블라인드 테스트 장면은 조작됐다”고 비판한 뒤 네티즌과 이른바 ‘막걸리 설전’을 벌였다. 이후에도 그는 페이스북에 ‘백종원 저격’으로 보이는 글을 올렸다. ‘떡볶이가 맛있다는 주장은 이명박 정부가 세뇌시킨 결과’ ‘활어회를 먹는 건 숙성회를 먹는 일본인과 차별화하려는 반일 감정 때문’이라는 그의 이전 발언까지 다시 논란이 됐다. 숱한 지적에도 수긍하지 않는 그를 향해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주관적 독선에 대해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비법 양념을 뿌려 대중에게 팔아치우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했다. 황교익은 지난해 11월 tvN 수요미식회에서 하차한 뒤 유튜브 채널을 열고 독설을 이어가고 있다.

알맹이보다 자극적 전달에 집중하니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한국사 강의로 전국구 명성을 얻은 설민석 단꿈교육 대표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MSG(식품 첨가물) 설명’으로 인기 끌었지만, 그것 때문에 발목 잡혔다. 3년 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이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마셨고, 손병희는 마담 주옥경과 사귀었다”고 발언했다가 민족 대표 33인의 후손으로부터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다. 지난해 11월 결국 후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스타 강사 최진기 오마이스쿨 대표 강사는 ‘어쩌다어른’에서 조선 미술사 강의 중 현대화가 이양원의 그림을 장승업의 그림으로 설명했다가 하차하는 일도 있었다.

김미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전문가가 대중 강연으로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과 비전문가가 쉽게 얘기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며 “사람들이 주목만 받으려고 막 던지는 지식에 현혹되면 안 된다”고 했다.

김헌 서울대 인문대학원 교수는 “설득에선 세 가지가 중요하다. 로고스(이성에 근거한 인식), 에토스(도덕성), 파토스(감정) 세 가지다. 지식셀럽은 이 중에서 파토스에 치중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접근하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럴싸한데 차분히 보면 오류가 있다. 사람들이 뒤늦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신뢰를 잃는다”고 했다. 김 교수는 “당장은 별 재미가 없더라도 정확한 정보를 꾸준히 주면서 방향성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제되는 말

과거의 말은 곧 증발했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영원히 박제된다. 증거가 남기 때문에 당연히 치명타다. 손혜원 의원도 신 전 사무관을 ‘저격’해 올린 글이 논란이 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삭제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공유해 인터넷 공간에선 원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페이스북’ ‘카톡’ 등 SNS와 인스턴트메신저는 말과 글의 경계를 무너뜨린 지 오래다. 다들 말하듯 글을 쓴다. 설화(舌禍)와 필화(筆禍)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손혜원 의원과 황교익 저격 논란은 페이스북 글로 시작됐지만, ‘글 싸움’이 아니라 ‘말싸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미현 교수는 “SNS의 기본 구조는 시선을 끌어 ‘좋아요’를 많이 받는 건데 문어체는 재미가 없다”며 “진지한 글보다는 말 같은 글이 훨씬 주목받기 쉬워 구어체, 신조어가 판치는 것”이라고 했다.

막말 논란을 일으킨 당사자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논란을 만드는 것도 과거와는 다른 현상이다. 배종찬 소장은 “발언한 사람은 자신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소수라고 해도 조용히 있어서 잊히는 것보다는 자꾸만 자극적인 정보를 쏟아내 계속 회자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인지도로 먹고사는 그들에겐 욕먹는 것보다 대중에게 잊히는 게 더 무서운 법”이라며 “더 센 말을 거듭해 과거 막말을 인터넷 검색에서 뒤로 밀어내는 것도 그들이 취하는 전략 중 하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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