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추위에 노인이 골목 청소? 쫓기듯 시작하는 일자리 사업

조선일보
  • 황지윤 기자
    입력 2019.01.03 03:00

    야외근로 많아 3월부터 시작했는데… 정부, 구청에 조기집행 요청

    서울 한 구청에서 노인 일자리를 담당하는 공무원 A씨는 최근 보건복지부로부터 온 공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복지부는 공문에서 '정부의 일자리 및 사회간접자본(SOC) 조기 집행 계획에 따라 특히 저소득 노인이 주로 참여하는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에 대한 조기 추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매년 3월에 시작했던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사업'을 올해는 1~2월로 앞당겨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A씨는 "1~2월은 날이 추워 3월부터 사업을 해왔던 것인데, 혹한기에 어르신들을 어떻게 거리로 내몰지 걱정"이라고 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 골목에서 노인들이 쓰레기 등을 줍고 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 골목에서 노인들이 쓰레기 등을 줍고 있다. 이 같은 노인 일자리 사업은 통상 혹한기를 피해 매년 3월부터 진행됐다. 올해는 정부 지침에 따라 사업이 한두 달가량 앞당겨질 예정이다. /이태경 기자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사업은 65세 이상 노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업이다. 2004년 시작해 올해 16년째다. 중앙정부가 예산을 배정하면 구청과 민간 기관에 나눠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 근로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일자리형 사업'과 거리 청소 등 근로시간은 짧은 '사회활동형 사업'으로 나뉜다.

    구청 등 지자체가 주관하는 사업은 사회활동형이다. 올해 61만개 노인 일자리 가운데 80%인 48만7000개가 이런 사회활동형이다. 길거리 쓰레기 줍기, 등·하굣길 초등학교 건널목 안내 등 야외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서울 지역의 경우 구청이 주관하는 사업은 60% 이상이 야외근로다.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사업
    구청 관계자들은 "2004년 노인 일자리 사업을 시작하고 1월부터 야외에서 일을 시키라고 한 적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날이 풀리는 3월 시작해 9개월간 일을 시켰다. 1~2월에 일을 하는 경우는 노인이 다른 노인의 수발을 돕는 '노노(老老) 케어' 등 실내에서 활동하는 5만여 개 일자리뿐이다.

    노인 일자리 사업 조기 시행에 대해 복지부는 "노인들의 동절기 소득 공백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사업 기간이 9개월로 정해져 있어 1월에 시작할 경우 올 9월에 사업이 끝나 노인들이 올겨울에 소득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선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조삼모사식 행정"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또 "현 정부가 소득분배지수에 특히 민감하다 보니 벌어진 일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노인 일자리 예산을 조기 투입해 1분기 가계동향조사 지표를 올리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장 노인들을 한겨울 거리로 내보내야 하는 구청들은 안전사고가 일어날까 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일부 구청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어르신 안전이 걱정되지만, 위에서 추진하라니 1월부터 할 수밖에 없다"며 "다만 혹한기에는 단축 근무가 허락되기 때문에 시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어르신들께 활동비 전액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구청 관계자는 "낙상 사고가 우려돼 기존처럼 3월에 시작하기로 했다"며 "복지부 공문은 지침일 뿐이지 강제성은 없다"고 했다. 복지부 노인지원과 관계자는 "안전 문제를 고려해 1월에는 실내 사업 위주로 진행하라는 지침도 내렸다"고 했다.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가하는 노인들은 "날이 춥지만 어쩌겠느냐"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사는 홍명자(79)씨는 지난 6년간 빠짐없이 '우리 마을 클린 도우미'로 일했다. 구청이 주관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 가운데 하나다. 매년 1월 말쯤 구청에 신청해 2월에 발표가 나면 3월부터 11월까지 약 9개월간 일했다. 하루 3시간씩 한 달에 10일 휘경동 일대 골목 쓰레기를 줍고 구청에서 월 27만원을 받았다.

    홍씨는 올해도 지원할 예정이다. 도우미로 선정되면 홍씨는 2월부터 거리로 나가게 된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구청이 사업 시행 시기를 앞당겼기 때문이다. 홍씨는 "몸이 성하지 않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선다"고 했다. 홍씨에게 27만원은 기초연금을 제외한 유일한 수입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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