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발길질·멱살잡이… 진료실 살인은 예고된 비극"

입력 2019.01.02 03:01

정신과 의사 사망사건에 의료계 충격 "남 일 같지 않아"

응급의료 방해 신고, 고소 현황

지난달 31일 오후, 조울증 환자(30)가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외래 진료실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47)를 흉기로 마구 찔러 숨지게 했다. 범인은 피해자가 도망치자 뒤쫓아가며 집요하게 공격했다. 의료계는 참담해했다. "안타깝지만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말이 나온다.

◇정신과 의사들 "언젠가 터질 줄 알았다"

고인은 자살 예방에 힘 쏟아온 우울증 전문가였다. 2016년 본지 인터뷰에서 "갑자기 닥친 불행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화살"이라며 "'왜 하필 내게?'라는 질문을 아무리 해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했다.

이날 범인은 길이 33㎝짜리 흉기를 사전에 준비했다. 하지만 그가 의사와 단둘이 마주 앉기 전까지 누구도 범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환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요 병원 정신과 의사들 책상에는 대개 '콜벨'이 붙어있다. 응급 상황에서 간호사·보안요원을 호출하는 벨이다. 피해자도 콜벨을 누르고 복도로 뛰쳐나왔지만 보안요원이 왔을 땐 이미 중상을 입은 뒤였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이날 "정신과 의사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비극"이라는 성명을 냈다. 이번 사건이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 A씨는 "이번 사건을 보니 보안요원을 대동하고 환자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또 다른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B씨는 "위험을 미리 걸러낼 방법이 없다"고 했다. "정신과 특성상 의사가 감기에 걸려도 혹시 환자가 오해할까봐 마스크도 못 쓰고 진료하는데, 소지품을 미리 검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신과 전공의인 이승우 대한전공의협회장은 "3~4개월에 한 번씩 환자에게 발길질을 당하거나 멱살을 잡히는 일이 생긴다"면서 "이번 사건을 보니 '목숨을 걸고 치료해야 하는 건가' 싶다"고 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신과 특성상, 환자가 의사에게 내밀한 사생활을 언급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간호사 없이 의사와 환자가 손 닿는 거리에 일대일로 마주 앉곤 한다. 이때 환자가 폭발하면 위기 상황이 된다. 지난해 7월, 강원도 강릉의 한 병원에서 조현병 환자가 "(의료진을) 죽이겠다"면서 주먹과 망치를 휘둘렀다. 죽은 사람은 안 나왔지만 의료진이 얻어맞고 병원 집기도 박살났다.

이런 상황이 전보다 심해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2017년부터 정신질환자를 본인 동의 없이 입원시키는 절차가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의료정책연구소에 따르면, 미국·프랑스·일본 등에선 ①환자가 자해·타해 가능성이 있거나 ②환자 본인의 일상생활에 중대한 지장이 있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할 때 본인 동의 없이 입원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①과 ②에 모두 해당돼야 한다. '강제 입원'이 사회 문제가 되자 이를 막기 위해 절차를 엄격하게 바꿨는데, 지나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 "위험한 정신과 환자는 소수"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잇따르자, 작년 11월 국회는 응급실 폭행을 가중 처벌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응급실'이라는 제한된 공간만 법의 보호가 강해졌지, 병원 나머지 공간은 전과 마찬가지다.

병원마다 보안요원이 상주하지만, 대부분 외부 경비업체 직원이라 난동 부리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모 국립병원 정신과 전문의 C씨는 "진료실 앞에 금속 탐지기를 두고 (흉기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의료계는 "응급실뿐 아니라 의료진 전체에 대한 폭행을 가중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방상혁 의협 부회장은 "의사 안전이 위협받을 땐 환자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도입하는 방안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청와대 게시판에도 "의사 안전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올라와 1일 오후 8시까지 약 2만명이 참여했다.

다만 정신질환자 모두를 잠재적 공격자로 낙인찍어선 안 된다는 우려도 높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과 교수는 "정신질환자 중에서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일부고, 이들도 적절한 진료를 받으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의사 출신 박호균 변호사는 "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데까지 나가선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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