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씨는 6·25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던 1958년 태어났다. '김영수'는 19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이름이다. 무술년 개띠 해였다. 출산율 6.0명이 넘는,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다.

늘 경쟁이었다. 초등학교는 '콩나물 교실'이었다. 학급당 80명이 넘어 오전·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했다. 중·고등학교는 팽팽하게 당겼다 풀어진 활시위 같았다. 서울 초등생 62만명 중 30만명이 과외를 받고, '국6병' '치맛바람'이란 신조어가 나올 만큼 중학 입시가 치열한 때였다. '중학교 무시험'이란 뉴스가 날아들었다.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실시됐다. 추첨기 돌려 중·고교를 정한 영수씨를 선배들은 '뺑뺑이'라 불렀다. 치열한 입시를 거친 윗세대와 구별 짓고 비하하는 말이었다.

1977년 어렵게 들어간 대학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유신 정권에 맞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문화의 꽃은 활짝 피었다.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통기타와 포크송이 퍼졌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 누구는 투사가 됐고, 누구는 진압군이 되어 서로를 마주했다. 서른 살 때 6월 항쟁이 일어났다. "직선제로 독재 타도!" 영수씨도 '넥타이 부대'에 합류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이라고 자부한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했다. '내 집 마련'과 '마이 카(my car)' 시대를 열었다. 1980년 18만대였던 자동차 보급은 10년 만인 1990년 190만대로 10배 이상 늘었다. 1970년 2조7950억원이었던 GDP(국내총생산)는 1990년 197조7120억원으로 70배 이상 증가했다. 조기유학 '기러기'도 유행했다.

위기는 마흔 살에 왔다. 1997년 11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구조조정 칼바람 속에서 '명퇴'가 일상 용어가 됐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란 말이 생겼다. 10년 뒤엔 미국발 금융 위기가 터졌다.

송호근 포스텍 교수는 "58년 개띠는 산업화의 인적 자본 역할을 하면서 가난을 극복하는 초인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후는 길고 자식은 계속 품어야 하는 현실에 당혹감이 크다"고 했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는 "가족 해체나 조기 퇴직 등으로 사회적 단절 및 정서적 격차가 심각하다"면서 "은퇴 연령에 대한 기계적 제한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