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지만 힙하다" 뉴트로 열풍 타고 젊은이들에게 인기
배민문방구 포스트잇 일력, 민음사 인생일력 등 조기 매진
직장인 김지희(32) 씨의 아침은 일력(日曆)을 뜯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력을 뜯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내년에도 이런 감정을 이어가고 싶어 새 일력을 장만했어요."
새해를 앞두고 일력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일력은 날마다 한 장씩 떼거나 젖혀 가며 그날의 날짜나 요일, 일진 등을 볼 수 있도록 한 책이다. 하루 한 장씩 표시되기 때문에 보통 얇은 습자지로 만든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 일력은 공책과 메모지를 대신했다. 손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든 일력을 휴지 대신 쓰기도 했다.
추억 속 일력이 ‘뉴트로(New-tro)’ 열풍을 타고 핫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부상했다.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한 복고 바람이 아닌, 과거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새로움을 느낀 결과다.
요즘 인기 좀 있다는 카페와 레스토랑엔 어김없이 일력이 걸려있다. 자체 제작해 기념품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서울 도화동과 원서동 등에 카페를 운영하는 프릳츠커피는 헬카페, 펠트커피, 외계인커피 등 5개 카페와 연합해 일력을 만들었다. 큼직한 날짜 아래 각 카페의 로고와 주소, 전화번호가 투박하게 들어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시골 다방 광고를 보듯 정겹다. 표지엔 독도의 전경 사진과 함께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글귀가 들어갔다.
아티스트 그룹 길종상가, 제주도 소심한 책방, 부산 해운대 언니네 사진관 등에서도 일력을 제작해 판매한다. 대학생 이동우(26) 씨는 1만5000원을 주고 내년도 복고풍 일력을 샀다. 달력치고 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이 씨는 "촌스럽고 투박한 디자인의 일력을 책상 옆에 걸어두는 것만으로 공간이 힙(hip)해지는 기분이다. 매일매일 날짜를 뜯는 콘셉트도 재미있다"고 했다.
달력 시장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일력 주문은 늘어나는 추세다. 달력 제작업체 캘린더코리아 관계자는 "365장을 인쇄해 엮는 일력은 제본이 까다롭고 제작기간도 오래 걸린다. 한동안 수요가 없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주문량이 늘고 있다. 특히 복고풍을 추구하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했다.
현대적인 디자인과 글귀를 가미한 디자인 일력도 좋은 반응을 얻는다. 배달의민족의 문구 사이트 배민문방구는 지난달 포스트잇 형태의 일력을 출시해 완판했다. 한 장씩 떼어 벽이나 냉장고에 붙여 볼 수 있다. 오늘의 운세, 카네이션 만들기, 태극기 그리기 등 시기적절한 놀잇거리도 들어갔다. 16일 막을 내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선 매일 다르게 디자인한 오디너리피플의 일력이 눈길을 끌었다.
출판사 민음사가 만든 탁상용 ‘인생인력’도 인기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인생일력은 일력에 논어, 한어, 사기 등 동양 고전문학 속 문장을 녹였다. 올해는 작년보다 3배 많은 6000부를 제작해 예약판매했는데, 이미 준비한 물량이 소진됐다. 주 구매층은 30대 초반 여성. 민음사 관계자는 "매일 뜯어 보는 일력에 교훈적인 내용의 동양고전 콘텐츠를 넣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선물을 위해 대량 구매하는 고객들도 많았다"고 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이어리도 한 주씩 정리하는 게 아닌, 하루 한 장 쓰고 필요하면 뜯어서 쓸 수 있는 데일리 플래너가 유행이라더라. 요즘 젊은이들은 미래지향적인 삶보다는 하루하루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충실히 산다. 이런 사고방식이 일력 등의 소비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